[정동칼럼] 블랙코미디로서의 '윤석열 현상'
[경향신문]
‘수권 능력’이라는 말이 있다. 정당 또는 당파가 사회의 여러 분야를 통할하고 전문가와 행정력을 동원하여 국가를 제대로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보수는 유능, 진보는 무능’이라는 식의 이미지도 있었다. 소위 ‘보수’가 관료사회와 기업가들을 잘 부려서 경제와 안보를 안정시킬 능력이 있고, 반면 ‘진보’는 운동권과 재야의 반대자들에 근거해서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이는 설정에서부터 허구이며 선동에 불과했다.
박근혜 시절을 상기해보자. 그 아비 시대로부터 물려진 김기춘 같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관료들과 거대 정당 한나라당은 용케 연속 집권에 성공했으나 정치·안보·안전 등 모든 면에서 대단히 무능했다. 최순실이 대통령 연설문을 작성하고 인사 결정에 개입했다. 김기춘 등이 한 일은 1970~1980년대식 검열과 정보정치를 되살린 것이었다. 세월호 참사로 학생·시민 수백명이 죽고,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한반도는 전쟁위기에 처했다. 박근혜와 그 정권에는 21세기 대한민국과 복잡한 현대사회를 민주적이며 안전하게 경영해갈 ‘수권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런 ‘무능 보수’에 대한 냉정한 심판이 탄핵이었다.
여전히 ‘보수’가 민주적 수권능력이 없고 피탄핵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가 윤석열과 최재형 같은 이들이 유력한 대선 후보라는 사실이다. 윤석열과 최재형의 행동양식, 언어, 견해를 보면 그들이 사법권과 고시 전문가인지 몰라도, 2021년 한국사회의 상식과 민주적 시민성(시빌리테)에는 미달해 보인다. ‘쩍벌’로 상징되는 태도와 120시간 노동, 후쿠시마, 페미니즘, 부정식품 등에 관한 일련의 망언은 그 인식이 단지 ‘보수’가 아니라 무지와 쓰레기 정보가 뒤엉킨 공백과 ‘이해 이전’ 상태임을 짐작하게 한다. 정리도 학습도 안 된 무관심과 무지, 자투리 우파 이념에 착종된 문장이 계통도 출전도 없는 ‘썰’과 반말조로 발화된다. 그런 몸가짐과 교양을 가진 중장년 남성을 요새 젊은이들은 ‘K(개)저씨’라 부른다 한다. 이젠 지하철 ‘오륙남’ 중에서도 ‘쩍벌’은 거의 없어졌다.
일련의 사례는 지식문화 연구자인 필자에게 대단히 흥미로워 보인다. 인지심리학, 사회학, 교양학 연구자들에게도 묻고 싶어진다. 이데올로기와 교양의 상관관계, 상명하복·폭탄주·룸살롱·스폰서 같은 정치검찰 특유의 ‘서브컬처’(?)가 정치인식과 지적 생활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말이다. 소위 ‘최고 명문대’ 학벌과 무시무시한 법조 경력, 가족들의 화려한 학위와 고급문화 종사는 왜 교양에 작용하지 못할까? 어떤 조건에서 문화지체와 시대착오가 ‘보수’로 의미화되는가? 교수, 의사, 과학자 등 폐쇄적 남성사회와 전문가주의 권력은 앎과 시민됨에 어떤 (악)영향을 미칠까? 사례는 가히 나 같은 중년 남성들에게도 반면교사가 될 만하다.
한국 대통령은 ‘제왕적’이라지만 그 때문에 수준 높은 제너럴리스트여야 한다. 다방면에 평균 이상의 식견이 필요하고 시대정신과 민초의 힘든 삶에도 더없이 민감해야 한다. 뼈아픈 각성과 장시간의 학습과 체득이 없으면 불가능한 능력이다.
정치 입문 1년밖에 안되는 아마추어가 국가 최고 통치자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코로나19로 가뜩이나 힘든 국민들이 왜 특권적 법조 귀족들 정치놀음의 모르모트가 되어야 하나? 소위 ‘K’의 ‘국격’에 쩍벌과 시대착오는 어울리나?
문재인 정권에 실망한 나머지 윤석열·최재형 같은 이들에도 관심을 가질 뿐이라는 분들에게는 위로의 뜻을 전하고 싶다. 실망과 분노는 십분 이해되지만 그 열정과 ‘애국심’이 아깝다. 정권의 위선과 무능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 바람직한 선택지를 갖기에는 사실 현재의 정치적 공간이 너무 좁다. 답답하다. 우리는 5년 주기로 두 당 중 하나를 억지로 선택하는 일의 공허와 한계를 잘 안다. 그래서 정주영, 문국현, 안철수, (입당 전의) 윤석열 같은 이를 대안처럼 여기게 한 인식도 늘 반복된다. 하지만 다 판타지 블랙코미디로 끝났다. 그런 정치적 에너지는 다른 데로 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심각해지는 불평등, 고용불안, 기후위기에 대해 전환적 입장을 가진 인물과 세력을 키우는 데는 많은 역량이 필요하다. 아래로부터 민주주의를 튼튼하게 할 새로운 진지와 무너진 시민사회를 다시 구축하는 데에도 큰 합력이 필요하다. ‘덜 부끄러운 사람’ ‘덜 나쁜 정당’을 반복 선택하는 게임이 아니라 근본적 상상과 긴 호흡을 위한 계기로서의 대통령 선거가 필요하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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