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도 암표상도 추억.. 굿바이 서울극장
20대부터 노인까지 첫날부터 발길 이어져
11일 오전 9시 40분 서울 종로3가 서울극장. 매표소 앞에 모처럼 줄이 생겼다. 오는 31일 폐업하는 서울극장은 이날부터 3주 동안 ‘고맙습니다 상영회’를 연다. 평일에 100명, 주말에 200명(선착순)까지 무료로 영화를 볼 수 있다. 줄에 늘어선 관객은 노인부터 30~40대 부부, 20대 청년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김정수(42)씨는 “90년대 ‘쥬라기 공원’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본 극장인데 소식을 듣고 아내와 함께 왔다”며 “몇 가지 추억이 있는 공간이 없어진다니 아쉽다”고 말했다. 40년 단골이라는 주화길(70)씨는 “단성사, 피카디리에 이어 서울극장까지 사라지면 내 젊은 날의 극장은 이제 대한극장 하나만 남는다”며 “사정이 있겠지만 언젠가 보란 듯이 부활하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서울극장 폐업은 코로나와 관객 급감,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OTT)의 약진 등 영상 산업의 생태계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이 극장을 운영해온 합동영화사는 1964년부터 ‘쥐띠부인’을 포함해 한국 영화 247편을 제작했고 ‘빠삐용’ ‘미션’ 등 외화 100여 편을 수입·배급했다. 고(故) 곽정환 합동영화사 회장이 1978년 세기극장을 인수해 이름을 바꾼 게 지금의 서울극장이다.
대기업 멀티플렉스가 등장하기 전 서울극장은 영화인들에게 상징적인 장소였다. 매표소 앞에 늘어선 줄로 흥행을 가늠했기 때문이다. “개봉일에는 극장 옆 2층에 있던 커피숍 ‘팡세’에 배우와 감독, 관계자가 모여 매표소만 내려다봤어요. 관객 줄이 길면 ‘중국집 가서 탕수육 먹자!’가 되고 썰렁하면 ‘자장면이나 먹자’ 했지요.”(봉준호 감독)
각종 시사회와 오징어, 암표상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고 이제 극장 자체가 문을 닫는다. 이날 오전 10시 10분 ‘모가디슈’를 상영한 H관에는 무료임에도 관객이 10명밖에 안 됐다. 상영 전 영화 ‘싱크홀’ 광고는 서울극장에 닥친 진짜 재난(폐업) 때문에 둔감하게 다가왔다. “코로나 예방은 백신으로, 마음 치료는 한국 영화로. 극장에서 다시 만나요~”(배우 정우성)라는 말도 부조리하게 들렸다.
이날 무료 티켓은 정오쯤 소진됐다. 굿바이 상영회 메뉴는 ‘모가디슈’ ‘인질’을 비롯한 올여름 화제작부터 ‘사랑 후의 두 여자’ ‘휴먼 보이스’ 같은 미개봉작, ‘프란시스 하’ ‘걸어도 걸어도’ ‘퐁네프의 연인들’ 등 흘러간 명작까지 다양하다. 극장 건물을 장차 어떤 방식으로 활용할지는 미정이다. 서울극장은 “영화에 국한되지 않는 콘텐츠 투자와 제작, 새로운 형태의 극장업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매표소 앞에서 만난 강인구(77)씨는 60~70년대 은막 스타였던 배우 고은아(현재 서울극장 대표)씨의 팬이라고 했다. “나처럼 아날로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익숙한 공간들이 자꾸 없어지니 쓸쓸해요. 고은아씨에게 ‘그동안 수고하셨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여기 서너 번 더 올 거예요.”
거리로 나오자 땡볕이 쏟아졌고 매미가 울었다. 서울극장 건너편 아크릴 가게들에선 이날도 분주히 짐을 실어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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