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민족이 '피해자'인 시대..갈등은 봉합될 수 있을까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일본에서는 8월 초가 되면 1945년 미군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희생자 추모 행사가 전국에 방송되고, 당시 참상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 과정에서 부각되는 사실은 일본이 세계 첫 전쟁 피폭 국가라는 점이다. 원자폭탄은 삽시간에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극심한 고통을 겪은 생존자도 있었다. 원폭으로 인한 '희생'은 엄청났다.
한국에서도 8월은 피해를 곱씹는 시기이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아흐레가 지난 뒤인 8월 15일 우리나라는 주권을 되찾았다.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일제가 저지른 참혹한 행동과 우리 민족이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을 강조하는 말이 넘쳐난다.
한국인 상당수는 일본인이 원자폭탄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며 피해자임을 자처하는 것을 어색하고 껄끄럽게 느낄 수 있다. 일본은 우리 기억 속에서 가해자일뿐더러 설령 일본이 피해를 보았다 하더라도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하면서 준 피해는 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사학자인 임지현 서강대 교수는 신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휴머니스트 펴냄)에서 각국이 피해자 혹은 희생자임을 자처하는 이유에 주목하고, 이러한 현상이 과연 갈등 해결에 도움이 되는가를 냉철하게 분석한다.
이번 책의 제목이기도 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희생자라는 의식을 동원해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행태를 뜻한다. 부제인 '고통을 경쟁하는 지구적 기억 전쟁'은 각국이 누가 더 '우월한' 희생자인지 다투는 상황을 표현한 용어다.
저자의 논의와 관점은 2019년 선보인 전작 '기억 전쟁'과 맥이 닿아 있다. 그는 이 책에서도 희생자 숫자가 공격이나 비난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고 말했다. 두 나라가 전쟁을 벌였다면, 사망자가 더 많은 나라가 훗날 상대국보다 도덕적 우위에 선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집단으로서 어느 민족이 더 큰 희생자인가를 놓고 경합하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지구적 기억 공간의 일상적 모습이 됐다"며 "희생이 크고 끔찍할수록 그 민족은 더 큰 도덕적 정당성과 '존재론적 우선권'을 부여받는 것처럼 생각됐다"고 지적한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가해자 민족이 있어야 비로소 성립한다. 그런데 문제는 거의 모든 민족이 한편으로는 가해자였다는 데 있다.
예컨대 폴란드에서는 한 역사학자가 1941년 7월에 발생한 유대인 학살 사건의 주체가 폴란드인이라는 내용을 담은 책을 발간해 적지 않은 충격을 줬다. 그동안 폴란드인은 스스로 나치 희생자이자 유대인을 구출한 민족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신념이 신기루처럼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일제가 동남아시아를 침략했을 때 동참한 한국인 중 일부는 전범으로 처형됐다. 우리는 그들을 '어쩔 수 없이 부역한 불쌍한 피해자'로 인식하지만, 동남아시아의 시각으로 보자면 가해자였다.
저자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면서 "규칙은 그대로 둔 채 패자의 자리에서 승자의 자리로, 희생자의 자리에서 가해자의 자리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겠다는 욕망을 낳기 쉽다"고 이야기한다.
적대와 혐오를 낳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청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가해의 기억을 부정하지 말고 직시하자고 제안한다. 또 폴란드 가톨릭 주교단이 가해자 독일인을 용서한다는 서신을 서독 주교단에 보낸 사건을 소개하면서 '국가의 사과'라는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식의 화해를 도모하자고 말한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기억들이 충돌하고 얽히는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생길 수도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기억의 연대'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기 민족의 희생을 절대화하고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 뒤에 줄 세우는 기억의 재영토화에서 벗어날 때,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희생시킬 때, 기억의 연대를 막는 장벽이 터지면서 지구적 기억구성체는 다양한 기억이 합류해 흐르는 연대의 실험장이 될 것이다."
640쪽. 3만3천 원.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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