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는 일 하나 없는 청춘, 현실 위한 '웃픈 위로'
“원래 영화 가제는 <호구>였어요.(웃음) 시나리오 단계에선 남자 주인공이라 <호구>로 지었는데, 여자 주인공으로 바뀌면서 안 어울리는 것 같아 <생각의 여름>으로 바꿨죠.”
제목에 대한 질문에 김종재 감독은 뜻밖의 비하인드를 들려줬다. 첫 장편 데뷔작이 <호구>가 될 뻔했던 김 감독과의 인터뷰는 지난 9일 전화로 이뤄졌다. 그는 “2030세대 관객분들이 현실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며 “누구나 겪는 연애와 취업부터 인간관계, 혼자만의 삶까지 다양한 문제들을 주인공이 스스로 극복하면서 서툴지만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관객들의 공감을 얻고 싶었다”고 했다.
12일 개봉하는 <생각의 여름>은 감독의 말마따나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청춘들을 위한 ‘웃픈’ 위로 같은 영화다. 시인 지망생 ‘현실’(김예은)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만, 더 격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증을 앓고 있다. 시 공모전 마감이 내일로 닥쳐왔지만, 마지막 한편의 시상은 떠오르지 않는다. 반소매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강아지 ‘호구’와 나간 산책길에서 웬 어린 녀석이 전화번호를 물어온다. 하지만 현실은 이 모든 게 그저 귀찮을 뿐이다. 집 앞 놀이터의 팔 돌리기 운동기구를 돌려보지만, 느닷없이 얼마 전 헤어진 남자친구가 소환되기에 이른다. 인형 뽑기를 좋아했지만, 인형은 싫어했던 이상한 놈. 현실은 남자친구가 자신의 집에 두고 간 물건들처럼 자신을 버리고 갔다고 생각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 카페에서도 생각만 여름처럼 무성하고 시는 한줄도 나아가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도 밥때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어서 동네 사는 선배에게 냉면 사달라고 연락했지만, 선배는 갑자기 전화를 끊더니 이후 받질 않는다. 되는 건 하나도 없고 시는 산으로만 갈 때, 현실은 진짜 산으로 향한다. 하지만 거기서 현실이 맞닥뜨린 건 영감이 아니라 자신의 첫사랑을 빼앗은 옛 절친. 같은 문예창작과 출신으로 이미 등단을 한 그와의 어색하고 불편한 조우. 과연 현실은 오늘 안에 마지막 한편의 시를 쓸 수 있을까.
<생각의 여름>은 하루 동안의 사소하고 무의미한 일상을 다루지만, 지루하거나 따분하지 않다. 현실을 비롯해 영화 속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엉뚱하면서도 유쾌하다. 또한 기약 없는 등단을 기다리는 현실과 독립영화 스태프로 살아가는 동창 남희(오규철), 카페 아르바이트생 유정(신기환)까지 안정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현실 캐릭터’ 그대로다.
특히 한밤중에 만난 동네 선배에게 현실이 무심코 내뱉었던 “오빠”라는 호칭에 그 선배가 “너 혹시 나를…” 하고 오해하자, 속마음 내레이션으로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이 양반아~’ 하는 대목은, 이 영화의 유머러스한 톤을 잘 보여준다. 흐린 청춘의 ‘현실’을 다루되, 방식은 밝고 위트 있게 그려내고 있는 것. 김 감독은 “어찌 보면 현실이 처한 상황들이 밝지만은 않지만 어둡게 표현하기보다는 ‘웃프게’ 표현하고 싶었다”며 “현실처럼 무기력하거나 우울한 상태에서 타인과 만났을 때 상대에게 내 그런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고 봤다”고 했다.
자칫 밋밋할 수 있는 흐름에 리듬감을 주는 건 영화음악으로 사용된 산울림의 명곡들이다. ‘기대어 잠든 아이처럼’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등의 곡들은 현실의 캐릭터와 어우러져 영화의 매력을 고조시킨다. 산울림의 오랜 팬이라는 김 감독은 “김창완 선생님이 쓰신 멜로디와 가사가 영화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화 속에서 현실이 쓴 것으로 나오는 시 다섯편은 모두 황인찬 시인의 실제 작품들이다. “현실이라는 캐릭터를 제 자신에 기인해서 만들었거든요. 현실처럼 무기력하던 시절에 황인찬 시인의 시들을 보고 뭔가 영화와 시가 접목된 걸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이 영화의 시작이죠.”
‘청춘들을 위한 시네마 詩에스타’라는 이 영화의 카피처럼 <생각의 여름>에는 시를 쓰다 낮잠(시에스타)에 빠져드는 장면이 곳곳에 등장한다. 영화는 우리에게 말하는 것만 같다. 지금 청춘들에게 필요한 건 나른하면서도 기분 좋은 낮잠 같은 위안이라고. 비록 자고 일어난 뒤 달라진 것은 없더라도.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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