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차다 '메로나' 먹던 소년이 럭비 귀화 국가대표 1호로..안드레진 인터뷰

이선화 기자 2021. 8. 1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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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아버지(노웰 코퀴야드)와 한국인 어머니(김동수 동덕여대 모델과 교수) 사이에서 태어난 안드레진 코퀴야드. 한국 럭비 대표팀의 역사적인 첫 올림픽 무대에 태극마크를 달고 함께 출전했습니다. 어머니의 나라에서 뛰고 싶어 4년 전 럭비로 특별귀화한 안드레진을 어제(10일) 뉴스룸에서 만나봤는데요. 못다한 이야기를 아래 일문일답 형식으로 풀었습니다.

◆ 관련 리포트

한ㆍ일전 지고 눈물 펑펑…'럭비 귀화 1호' 김진 선수

→ 기사 바로가기 : https://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2019542

2020 도쿄올림픽 럭비 국가대표 안드레진 코퀴야드

-귀국하고 바빠보인다

“바쁜 게 좋아요. 원래는 귀국하고 다들 연락 없고 관심도 없었거든요.”

-첫 올림픽 무대 어땠나

“제일 큰 무대에서 제일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아쉬운 점이 많아요. 럭비라는 종목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거든요. 그러려면 당연히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하는데, 그러진 못했던 것 같아요. 사실 우리는 1승도 힘들다는 걸 알고 갔거든요. 최선을 다하고, 노력을 하고 이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냥 실력 차이죠. 그래도 어린 친구들이 '이런 종목도 있구나' 정도만 알아준다면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2020 도쿄올림픽 럭비 국가대표 안드레진 코퀴야드

-한일전 마친 뒤 울었는데

“준비한 모든 게 갑자기 끝나서 슬펐던 게 가장 컸고요. 두 번째는 한일전이잖아요. 다 져도 한일전만 이기면 럭비를 이슈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죠. 일본에서 열리는 도쿄 올림픽에서 마지막 시합에 일본을 만나는 거. 제가 써도 더 좋은 스토리를 못 쓰는 거예요. 그런데 져서 실패했다는 느낌이 컸죠.”

-98년 만에 한국 럭비 처음으로 올림픽 출전권 따냈는데, 당시 기분 어땠는지

“솔직히 아직도 믿을 수 없어요. 우리끼리는 운동하면서 좋은 퍼포먼스 나오고 자신감 있었지만, 한국 럭비에 기대하는 분들이 많지 않았던 게 사실이니까요. 심지어 우리도 그랬어요. 아마 협회 높으신 분들도 기대 많이 안하셨을 거예요.”

-코로나로 올림픽 1년 연기되면서 힘들었을텐데

“국가대표는 올림픽이 잡히면 일상이 거기에 맞춰 돌아가고, 스케쥴도 협회에서 내려오기 때문에 이걸 1년 더 하는 게 쉽지 않아요.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건, 우리 럭비 대표팀의 역사적인 데뷔가 미뤄진다는 점이었죠. 첫 출전이고, 제 인생에서 한 번밖에 없을지도 모르는 기회인데 왜 지금 코로나가 오나 싶더라고요. 그런데 이 생각도 바로 버렸어요. 선수는 '무조건 한다' 생각하고 마음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죠.”

고등학교 시절 럭비 선수로 활동했던 안드레진 코퀴야드. 맨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

-럭비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첫 운동의 추억을 떠올리면, 공 차다 메로나 하나 먹었던 기억이 생각나요. 외동으로 자라 공이 가장 친한 친구였죠. 공만 있으면 행복했어요. 아버지도 대학교 때까지 미식축구를 하셨어요. 초등학교 4학년 즈음엔 '차범근 축구교실'에 다녔어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한국에서 보면서 축구 국가대표가 되고싶었죠. 농구도 즐겨 했어요. 그러다 캐나다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창밖에 선배들이 럭비를 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축구랑 농구랑 섞인 것처럼 발기술과 손기술이 모두 있고, 사람 대 사람이 부딪히는 거예요. 그 모습에 매력을 느꼈죠. 그길로 럭비를 시작했어요.”

-조금은 늦은 나이에 시작한 거 아닌가

“'엘리트 체육'이라는 표현을 저는 가장 싫어해요. 우리나라에선 어린 나이부터 선택을 해야해요. 운동을 할 건지 공부를 할 건지, 운동을 할 거면 어떤 종목을 할 건지. 시스템 자체가 그렇게 되어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나이에 뭘 알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또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에서는 운동만 하지 않고 일반 공부도 병행하거든요. 저만해도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는데, 럭비를 계속 했죠. 비록 졸업이 1년 늦어졌지만요.”

-한국 럭비팀엔 어떻게 들어오게 됐나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 상하이에 있는 회사에 다녔는데, 그때 럭비 실업팀에서 뛰다가 홍콩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어요. 인정을 받는 거잖아요. 사실 그 전까지는 선수까지는 못할거라 생각했거든요. 아직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이 말을 듣고 바로 대한럭비협회에 전화를 걸었어요. 홍콩이 저한테 콜을 줬는데 전 홍콩에서 뛸 생각이 없고, 아직 실력이 있다면 한국에서 한 번 도전해보고 싶다고요.”

-한국 럭비팀과의 첫만남은 어땠나

“깜짝 놀랐어요. 일단 덩치들이 너무 큰 거예요.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는 본 적 없는 한국 사람들이었어요. 제 키가 195cm인데 저보다 큰 선수들도 몇 있었고요. 그래서 '어 뭐지 이게? 처음 보는 한국 사람들이다. 피지컬은 우리도 안 밀리겠다' 생각했죠. 실력도 좋았어요. '왜 우리가 세계 랭킹이 낮지?' 싶을 정도로 잘하더라고요. 해볼만 하겠다 싶었죠.”

어머니 김동수씨와 안드레진 코퀴야드

-어머니가 좋아하셨겠다

“솔직히 처음에는 반대하셨어요. 한국은 럭비 불모지인데다, 성인이 된 이후 한국에서 생활해본 적이 없거든요. 한국말도 서툴렀죠. 그런데 막상 결정을 하고나니 어머니가 다 도와주셨어요. 어머니 없이는 아무 것도 못했을 거예요. 우리 어머니 마음 먹으면 무섭거든요.”

-응원도 자주 오셨나

“제일 시끄러웠어요. 제일 창피했죠.(웃음) 카메라가 관중석 비추면 우리 가족만 나왔어요. 카톡 전체메시지 돌려서 되는 사람 다 불러오는 것 같았어요. 서른명 정도 데리고 와서 태극기 다 나눠드리고. 시합 자체도 잘 모르시고 그냥 소리 지르러 오시는 것 같은데 너무 감사해요. 힘이 많이 나죠.”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아버지와 찍은 사진

-이번 올림픽도 가족들 응원이 대단했다고

“미국 가족이 시카고에 있는데, 태극기를 어디서 구해왔더라고요. 이번 올림픽에 미국도 출전했는데 한국을 응원해줬어요. 정말 감사하죠. 한국ㆍ미국 이런 거 떠나서 우리 가족이 우리 대표팀을 응원해준 거, 너무 좋았어요. 여담이지만 2002년 월드컵 예선에서 한국과 미국이 만났을 때도 한국을 응원했어요. 당시에는 미국 국적으로 한국에 살고 있을 때였죠. 아버지는 미국을 응원했을 거예요. 집안이 전쟁이었죠. 그런데 제가 한국 선택하니까 엄마와 저까지 2대 1이 되어버렸죠.”

-'졌지만 잘 싸웠다' 소리는 이제 그만 듣고싶다고

“'아름다운 꼴찌였다'라는 말 많이 들었지만, 다음엔 '우승 축하한다'는 말 들을 수 있게끔 노력할 거고요. 이번 럭비 통해 초등학생 몇명이라도 럭비 있는 학교를 찾아간다면 다음 올림픽은 아니어도, 15년 뒤, 20년 뒤엔 한국 럭비도 메달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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