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중의 명품이라 불리는 브랜드 '에르메스'의 역사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명품 중의 명품'이라는 별칭을 지닌 '에르메스'는 제품을 구매할 능력이 있다고 한들 제품을 구경하거나 구입할 수 있는 기회가 한정적인 브랜드다.
제품을 구매하거나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에르메스는 국내의 많은 소비자들이 구경하고, 구매하길 희망하는 명실상부 최고의 패션 명품 브랜드 중 하나로 군림하고 있다.
전시회에서는 브랜드 스토리를 담은 에르메스 컬렉션을 통해 그간의 역사와 디자인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제품을 구매하거나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에르메스는 국내의 많은 소비자들이 구경하고, 구매하길 희망하는 명실상부 최고의 패션 명품 브랜드 중 하나로 군림하고 있다.
국내 소비자에게 '에르메스'가 지니고 있는 위상은 지난 5월 국내에서 개최됐던 '에르메스'의 가방 전시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에르메스 가방 전시회는 오픈과 동시에 주말 예약이 종료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전시회에서는 브랜드 스토리를 담은 에르메스 컬렉션을 통해 그간의 역사와 디자인을 살펴볼 수 있었다.
에르메스는 설립 이후 18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운영되어 왔는데, 오늘은 '에르메스'의 역사를 간략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에르메스의 설립자인 '티에리 에르메스는' 1801년 프로이센 지역에서 프랑스인인 아버지와 독일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837년, 티에리 에르메스는 프랑스 파리의 마들렌 광장의 바스 듀 롬프르 56번가에서 안장과 마구용품 등을 생산하는 마구상을 내면서 브랜드의 시작을 알렸다.
품질에 대한 헌신, 청렴함으로 빠른 시간 안에 유명해진 에르메스는 1867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마구 제품을 가지고 1등상의 영예를 안아 마구의 우수한 품질과 견고함을 인정 받았다. 이후 그는 왕족들도 고객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됐다.
티에리 에르메스가 작고한 이후에는 그의 아들인 샤를 에밀 에르메스가 2대 가업을 승계했다. 샤를 에밀 에르메스는 아버지에 이어 만국 박람회에서 다시 한번 1등상의 영예를 안은 뒤 새로운 마구 용품 매장을 열어 본격적으로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산업혁명으로 산업화·도시화가 진전되면서 마차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 에르메스도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3대 가업을 이어 받은 티에리 에르메스의 손자 '에밀 에르메스'는 교통수단의 발전으로 여행 가방 산업이 팽창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에르메스의 '새들 스티치(Saddle Stitch, 마구 안장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바느질 기법)' 기술을 핸드백과 여행 가방에도 적용하여 고급스러운 가죽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제품영역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에밀 에르메스가 작고한 이후에는 로베르 뒤마가 가업을 희망하고 동서인 장 르네 게랑과 협력하여 브랜드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로베르 뒤마는 사륜마차 로고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오렌지 상자로 상징되는 브랜드 이미지를 발전시켰으며, 에르메스의 첫 번째 향수인 오드 에르메스를 출시했다.
또한 에르메스의 대표 제품인 켈리 백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1956년 모나코의 왕세자비 그레이스 켈리가 에르메스의 '쁘띠 싹 아 끄로와'를 들고 임신한 배를 가리고 있는 사진이 '라이프' 잡지를 통해 공개되면서 대중들은 이 제품을 켈리 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5세대 경영은 로베르 뒤마의 아들 장 루이 뒤마가 에르메스를 맡으면서 시작됐다. 장 루이 뒤마는 에르메스에 실크, 가죽, 기성복 라인을 더욱 발전시켰고, 팔찌, 자기, 크리스탈 등의 제품 라인을 추가하며 에르메스에 제2의 전성기를 가져오게 됐다.
박완영 로피시엘
<저작권자 ⓒ 로피시엘 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로피시엘 코리아 & lofficielkore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