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은 부디 법을 따르라

한겨레 2021. 8. 11. 16:5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상읽기]

[세상읽기]

임재성 ㅣ변호사·사회학자

“점심 약속은 불가능해.” 판사로 막 임용된 선배의 말이었다. “부장님이 따로 약속이 있으시면 몰라도, 거의 같이 먹어야 하거든.” 10년 이상의 부장판사와 저연차 배석판사 2인으로 구성된 1심 합의부 판사들의 보편적인 식사 풍경이다.

도제식이라 명명되는 ‘법관 교육 과정’의 본질은 인적 지배에 가깝다. 부장판사가 법관 생활을 시작하는 배석판사들을 가르치고 키운다. 배석판사 역시 자신의 이후 인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부장판사를 살뜰히 모시고 따른다. 재판 진행과 심증형성, 판결문 작성은 물론 먹고 생활하는 시간들까지 지도와 모방이 반복된다.

사법부가 판사의 임용, 인사를 넘어 교육까지 모두 틀어쥐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 사법부의 인식을 답습하지 않는 다양한 법관의 탄생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20~30대 우수한 성적의 자원들이 인생 경력의 시작을 판사로 한 사법부 내부에서 순혈주의는 당연했고, 임용 순서가 계급이 되는 서열주의 역시 팽배했다. 사법부가 독립적이었을지는 몰라도, 판사가 독립적이긴 어려웠다. 독립이란 주체성을 전제로 하는데, 비슷한 사람을 뽑아 기존의 관행과 관점을 그대로 주입하는 교육 속에서 판사의 주체성은 납작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사법개혁 논의의 한 성과로서, 2011년 ‘법조일원화’가 도입되었다. 젊은 법조인이 곧바로 판사가 되는 방식을 없애고,일단 모두 변호사가 되어 실무경력을 쌓은 후 그중에서 판사 임용이 이루어지는 제도가 법조일원화이다. 2013년부터 최소 임용 자격이 법조경력 3년, 5년으로 늘어났고, 2026년 최종적으로 10년이 된다.

법조일원화는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젊은 판사’가 아닌 ‘여러 경험을 가진 연륜 있는 판사’가 재판을 하는 것으로 초기에 표상되었고, 그런 맥락에서 사회적 지지도 적지 않았다. 법조일원화로 인해 만들어질 변화의 핵심은 경직된 사법부에서 ‘흐트러짐’을 발생시키는 것이고, 이는 보다 나은 재판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만든다.

먼저, ‘교육’의 측면에서 사법부의 독점이 깨진다. 법원에서 사회로 교육의 주체가 바뀐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10년 이상 실무훈련과 교육을 받은 법조인들이 판사가 되고 곧바로 재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법관을 선발하는 절차 역시 바뀔 수밖에 없다. 과거처럼 몇번의 시험성적만으로 줄 세우는 것이 아닌 10년의 경력을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험성적이 뛰어난 사람이 좋은 경력을 가질 가능성이야 높겠지만, 시험만으로 확인할 수 없었던 판사의 여러 자질까지 평가될 것이다. 결국 시민들은 더 능력 있는 판사를 만나게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순혈주의, 서열주의가 깨진다. 다양한 경험과 연차의 법조인들이 법관이 되는 상황에서, 이들에게는 경쟁해야 할 동기들도, 사법부라는 조직의 이해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도 흐릿할 수밖에 없다. 40~50대에 시작한 법관생활이기에 승진에 연연하지 않고 묵묵히 재판에 집중하는 판사 비중도 늘어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2011년 법원조직법 개정을 통해, 사법부의 위와 같은 변화에 합의했다. 법조일원화의 온전한 시행을 위해서는 신규 법관의 임용 조건만 바꾸는 것이 아닌, 조직문화·인사·처우부터 법관의 숫자까지 모든 면에서 변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지난 10년간 사법부의 분명한 노력은 확인되지 않았다.

김명수 대법원은 소극적 태도를 넘어 입법 로비를 통해 법을 바꾸려고 한다. 지난 7월1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소위에서 판사 지원 최소 법조경력을 5년으로 낮추는 법안이 의결되었다. 법원이 선발하고 관리하는 로클러크, 국선변호인 등으로 5년 중 대부분을 채울 수 있기에 순혈주의, 서열주의 타파는 물건너간다. 도제식 교육이 지속될지도 모른다. 지금의 법개정 시도는 법조경력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법조일원화 자체를 무산시키는 것이다.

법원은 최소 법조경력이 5년을 넘어가면 지원할 사람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합당하지 않다. 변화를 뒷받침할 조건을 만들 주체는 사법부였고, 10년 동안 그 노력이 부족했기에 지원자 부족이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법원이 주객이 전도된 주장을 하는 이유는, 결국 ‘예전처럼 하고 싶다’일 것이다.

법으로 정한, 2026년 법조경력 10년의 요건으로 하는 법관 임용 계획이 변경될 이유는 없다.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면, 법원이 왜 10년간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못했는지, 법조일원화를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에 맞춰져야 한다. 법원은 부디 법을 따르길 바란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