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벌적 손배제' 도입은 저급한 가짜뉴스 해결방안이다

이완기 전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 2021. 8. 1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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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미디어오늘 이완기 전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

자유 방임이 오히려 보편적 자유를 제약한다는 '자유의 역설'은 어느 시대에나 타당한 진리다. 그러기에 민주사회의 자유는 상반되는 또 다른 자유와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는 자유를 신성시하면서도 무분별한 자유에서 오는 독선을 방지하기 위해 자유를 제약하는 여러 가지 규범들을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규범들이 모두 말과 글로 표현되고 그것이 시대정신에 맞지 않을 때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 역시 말과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인간사회의 모든 일이 폭력이나 강제력이 아닌 말과 글로 이루어질 때 만인은 공평하게 자유로워지며 평화가 유지된다. 그런 의미에서 '표현의 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자유이며, 침범해서는 안 될 국민의 기본권으로 인식되어 왔다.

우리 역사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던 시대가 있었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긴급조치를 발동해 유신헌법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를 금지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던 유신정권은 결국 무너졌고 마음껏 폭력을 휘둘렀던 독재자도 폭력으로 종말을 고했다.

최근 가짜뉴스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언론에도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논란을 빚고 있다. 한 마디로 저급한 해결방안이다. 더구나 촛불 정권이라고 자처해 온 여권 일각에서 그런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 2016년 12월3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6차 주말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흔들고 있다. ⓒ 연합뉴스

2016년 박근혜 정권을 무너뜨린 촛불집회에서는 사회 각계·각층에서 목말랐던 주의·주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개중에는 허위사실도 적지 않았고 혐오 표현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주의·주장들을 포용하면서 하나의 목표로 뜻을 모으고 촛불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표현의 자유'가 살아 넘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징벌적 손해배상'과 같은 강제규범으로 가짜뉴스를 줄일 수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는 이익과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켰을 때 나타나는 손실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웠다.

2005년 PD수첩은 황우석 연구팀이 세계적 권위의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발표한 인간배아줄기세포 논문이 허위임을 폭로해 전 국민적 반대여론에 직면하고 광고불매운동 등으로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결국 진실은 밝혀졌고 황우석이 배양한 인간배아줄기세포는 모두 가짜였음이 드러났다.

PD수첩이 온갖 비난을 무릅쓰고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황 박사의 거짓을 용기 있게 폭로할 수 있었던 것은 '진실에 대한 믿음'과 '표현의 자유'가 커다란 버팀목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 당시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와 같은 강력한 법이 존재했다면 '가짜 줄기세포'에 대한 진실은 빛을 보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2008년에 있었던 미네르바 사건도 매한가지다. 다음 아고라에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인한 환율폭등과 금융위기를 예언한 박대성은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었다. 그러나 그의 예언은 상당 부분 현실로 나타났고 박대성은 무죄로 풀려났다. 이러한 사실들을 반추해 볼 때, '표현의 자유'를 강력한 법으로 제약하는 것은 사회적 득실 면에서도 이롭지 않다.

인간의 생각과 표현방식은 완벽할 수 없고, 가짜뉴스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자본주의체제를 사는 우리는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일에 익숙해 있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제한했을 때 나타나는 사회적 손실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듯이, 가짜뉴스가 사회에 뿌려놓는 폐해를 징벌적 배상이라는 무기로 징치하는 것 또한 바람직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상식, 양심, 도덕률과 같이 강력한 강제성은 아니더라도 악을 선도하는 여러 가지 수단들이 있다. 언론사의 윤리 규범이나 불문율도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그 중 하나의 대안이다. 문제는 그것들을 제대로 지키거나 활용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 가짜뉴스 이미지. 사진=ⓒ gettyimagesbank

중요한 것은 예방이며 가짜뉴스가 서식하기 어려운 언론환경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정파성, 승패만을 중시하는 극도의 진영, 극심한 상업주의 등 가짜뉴스가 창궐하게 하는 언론환경을 바꾸어주어야 한다. 검증도 없이 가짜뉴스를 퍼 나르면서도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주류언론의 무감각도 가짜뉴스가 만연하는 주요인이다.

이러한 언론환경이 지속되는 한, 가짜뉴스는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 언론과 언론인이 수치심을 느끼도록 언론계 내부가 끊임없이 상호 감시하고, 경고하고, 각성을 촉구하는 풍토를 만들어간다면 가짜뉴스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정치권은 가짜뉴스를 법으로 징치하기 전에 언론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글과 같은 과잉경쟁의 언론시장이 지속되고, 공영언론이 상업주의 물결 속에 잔뜩 위축된 모습으로 머물러 있는 한 언론환경은 바뀌지 않는다.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인간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제약받고 있는 현실에서 가짜뉴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속에서 언론에 시대정신을 기대하는 것은 공염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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