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섬멸할 수 없다면 같이 살아야한다
(지디넷코리아=이균성 총괄에디터)우리는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을 ‘전쟁의 관점’에서 보는 경향이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싸워서 이겨야만 하는 ‘적(敵)’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그 최종 목표는 ‘적의 박멸’이다. ‘적의 박멸’은 현실적으로 ‘집단면역’을 의미한다. 모두가 백신을 맞고 몸에 항체를 생성함으로써 설사 바이러스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존재의미’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마스크를 벗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전쟁은 불행하게도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적에 대해 아는 바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적을 모르고 적을 이긴 경우는 없다. 이 전쟁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이기려면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해 낱낱이 알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보인다. 적은 고정돼 있지 않다. 인류의 의료과학보다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1년 반이 넘는 코로나19 시대의 경험은 인류의 의료과학이 적의 뒤를 느린 속도로 추적할 수 있을 뿐이지 선제적으로 적의 앞길을 가로막아 한 방에 섬멸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만을 알게 해준 것 같다. 이 사실은 희한하게도 전문가나 정책 당국자보다 코로나19에 무지할 수 있는 일반인이 더 잘 깨닫고 있다. 전문가나 정책 당국자는 이 사실을 알고도 어쩌면 쉬쉬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만약 당장에 적을 섬멸할 길이 없다는 진단이 진실에 가까운 것이라면 우리는 잘못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잘못된 전쟁을 이끄는 주체는 전문가나 정책 당국자가 된다. 그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게 하고 새로운 방식의 대응에 나설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 된 것이다. 그러려면 그들이 이 사실을 쉬쉬할 수밖에 없는 이유부터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무지고 하나는 공포다. 무지는 적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이길 수 있다는 섣부른 낙관론으로 귀결된다. 결과는 되레 악화될 뿐이다. 공포는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자칫 지나친 비관론에 빠져 사회를 크게 혼란시킬 우려가 그 하나고, 그로 인한 정치적 책임을 떠안아야 할 우려가 또 다른 하나다. 무지와 공포에서 해방돼야만 비로소 진실을 볼 수가 있다.
무지와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쪽팔림을 무릅쓰더라도 모른 건 모른다고 솔직히 말할 용기를 내야하고, 정책 당국자는 더 큰 승리를 위해 편협한 정치적 판단을 버릴 용기를 보여야한다. 그들의 용기만 바랄 수는 없다. 그들이 용기를 내게 하려면 일반인의 지지가 필요하다. 이 싸움의 관건은 특정 부대의 용맹함에 달린 게 아니라 사회적 합의에 달렸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난 싸움이 그렇다고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곳곳의 전투에서 많은 승전보를 올린 게 사실이다. 훌륭한 치료제들이 나왔고 효과가 분명한 백신도 개발됐다. 그 결과 치명률이 낮아지고 그만큼 두려움도 줄일 수 있었다. 모두가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면서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그럼으로써 연대의 정신도 확인했다. 이런 구체적인 경험과 자산이야말로 승리의 밑천이 된다.
이런 경험과 자산을 믿는다면, 이제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의 관점을 ‘전쟁에서 생활로’ 전환하는 논의를 해보는 게 어떨까 한다. 바이러스의 끊임없는 변이를 우리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게 사실이라면 ‘단기간의 집단면역’이라는 환상적인 목표에 매몰되지 말고 좀 더 현실적인 대응 전략을 고민해보자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 다 ‘정치적 입장’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코로나19를 ‘정치적 이해’보다 ‘합리적 진실’의 관점에서 보자는 뜻이다. 그러면 ‘합리적 진실의 관점’이란 무엇인가.
첫째, 백신은 효과가 있다. 정부는 백신 확보와 접종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둘째, 백신이 효과가 있더라도 바이러스가 얼마나 어떻게 변이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단기간 집단면역’은 불가능할 수 있다. 이를 인정해야 한다. 셋째, 단기 집단면역이 불가능하다면 지금보다 더 중증환자나 바이러스 취약자에 집중해야 한다. 모든 이가 아픔을 면하는 것보다 죽는 이를 살리는 게 더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감염자 숫자에 대해 지나친 공포 조장은 오직 정치적 당파성에만 이로울 뿐 사회적으로는 도움이 되는 게 하나도 없다. 특히 언론은 이 점을 더 잘 이해해야 한다. 언론은 코로나19 대응에서 혼란을 부추기는 게 아니라 사회적 연대를 확대하는 쪽으로 기능해야 한다. “적(敵)을 섬멸할 수 없다면 같이 살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 이 말의 함의를 합리적으로 생각해야만 할 때가 됐다.
이균성 총괄에디터(sereno@zd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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