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하기와 모호하게 말하기 [오늘을 생각한다]

2021. 8. 1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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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한다 대신 하지 않겠다”, “정확함 대신 모호하게.” 20대 대통령선거 후보들의 공통적인 화법이다. 유권자 간 동상이몽을 꾀하는 최적의 전략이다. 당장 현실의 문제가 적나라할수록 내일의 선거는 불붙는다. 유권자의 불만이 곧 민주주의의 원동력이다. 이에 대통령후보들은 사회적 불안과 불만의 총량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이러저러한 것은 하지 않겠다”고 호소한다. 간혹 현 문제의 구체적 대안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면, 후보자들은 모호하게 비껴간다. 급조된 시대정신을 인용해 응수한다. 심심찮게 인용되는 ‘자유민주주의’ 또는 ‘복지국가’가 해답일 것이라 단언하는 방식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한다, 대신 하지 않겠다” 원칙과 “정확함 대신 모호하게” 원칙을 잘 섞어 거의 모든 사안을 같은 논리로 대응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대통령후보들이 일삼는 ‘부정하기’와 ‘모호하게 말하기’ 전략은 시민에게 사실 이상의 환상을 제시하고 있다. 기존 정책 결과를 부정함으로써 잘못된 투표로 세상이 도리어 후퇴됐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판단 불가능한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환상을 품게 한다. 저마다의 동상이몽 속에서 각자 지켜야 할 것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대통령후보 개개인은 구체적인 내용 그 어떤 것도 보장한 적이 없는데, 유권자가 능동적으로 저마다 바라는 정책이 아마도 ‘자유민주주의적’인 것 ‘신복지적’인 것, ‘돌봄사회적’인 것의 일종이라 단정하며, 해당 후보의 선출과 그 가치 실현을 갈망하게 된다. 원래 시대정신(Zeitgeist)은 한 시대를 관통하는 뚜렷한 절대적인 정신을 상징했으나, 대선 속 시대정신은 뚜렷함을 표방하기는커녕 모호함을 추구하며 정치적 피아 구분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장막의 용도로 활용된다.

대통령후보들이 시대정신을 주창하는 것이 곧 문제라 비난하려는 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높은 지지율을 지닌 후보가 될수록 ‘구체적인 말 대신 보다 추상적인 말’에 더욱 의존하고, ‘한다는 말 대신 하지 않겠다는 말’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대통령선거가 다가올수록 지상의 민주주의와 멀어진다. 천상계에서 헤엄치는 형체 없는 말들이 선거 후 민생에 연착륙 가능할지 우려될 정도로 높이 비행한다.

정책 내용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대선 공중전이 매일 계속되고 있다. 초현실주의적이다. 대선 후보의 판단 근거라고는 그저 ‘느낌적 느낌’밖에 없다. 정책 내용은 안중에도 없다. 이제라도 가볍고 모호한 말들에서 벗어나 국정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부정하기, 모호하게 말하기 전략 속 사라진 정책을 향해 안부라도 묻는다. 정책들아, 안녕. 잘 지내니? 신기루 같은 자유민주주의, 복지국가, 공정과 정의 담론에 억눌리지 말고, 밥 잘 챙겨먹고. 그나저나, 저상버스는 언제 전부 설치될지, 부양 의무자 기준은 완전 폐지될는지, 자영업자 지원책은 무엇이 있을지, 주거권 보장은 이루어질지, 고통받는 현실에 응답 좀 해줘!

변재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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