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훈련 축소했더니.. 김여정 "미군 철수하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당중앙위 부부장이 한미 연합 훈련 사전 연습이 시작된 10일 담화를 내고 “남조선 당국자들의 배신적인 처사에 강한 유감을 표한다”며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자멸적인 행동”이라고 했다. 북한은 이날 오후 4시 남북 간 통신선 연락에 응답하지 않았다. 지난달 27일 복원된 지 2주 만이다. 김여정의 1차 경고(8월 1일) 이후 정부·여권이 앞다퉈 훈련 축소·연기를 주장하고 실제 군 당국이 훈련 규모를 대폭 축소했지만 북한은 대남 비난을 퍼부으며 남북 관계를 다시 닫았다.
김여정은 담화에서 “연습의 규모가 어떠하든,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든 전쟁 시연회, 핵전쟁 예비 연습이라는 데 이번 연습의 침략적 성격이 있다”고 했다. 이어 “미국이 남조선에 전개한 침략 무력과 전쟁 장비들부터 철거해야 한다”며 “미군이 남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한 화근은 절대로 제거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연합 훈련 중단을 넘어 주한미군 철수까지 요구한 것이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 미·북 대화가 진행 중이던 2019년 초 ‘김정은이 주한미군 문제는 한미 양국의 문제임을 이해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하지만 김여정은 이날 담화가 ‘위임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김정은의 직접적 의중을 담았다는 의미다. 연합 훈련을 트집 잡는 김정은 정권의 최종 목표가 주한미군 철수라는 속내를 드러낸 셈이다. 청와대는 이날 김여정 담화에 대해 “예단하지 않고 북한의 태도를 면밀하게 주시하고 있다”고만 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훈련 중단을 넘어 주한미군 철수까지 요구한 것은 한마디로 한미 동맹을 해체하라는 얘기”라며 “김여정의 하명에 따라 전단금지법을 만들고, 개성 공동연락사무소 폭파의 책임조차 묻지 않으니 한국을 얕잡아 보고 안하무인 격으로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전직 고위 외교관은 “북의 연합 훈련 비난은 새롭지 않지만 ‘배신’이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며 “문 대통령이 최근 김정은과 여러 차례 친서를 주고받으면서 무슨 언질을 준 것 아닌가라는 의심이 든다”고 했다.
김여정의 한미 연합 훈련 폐지와 주한미군 철수 요구는 북한의 해묵은 주장이다. 북한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장해 온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와 ‘근본 문제 해결’이 결국 주한미군 철수를 뜻한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남북 대화가 시작된 이후 김정은 정권이 한미 연합 훈련이나 미군의 한국 주둔을 양해하는 것처럼 주장해왔다.
문 대통령은 2019년 신년 회견에서 주한미군에 대한 김정은의 인식을 소개하며 “주한미군 문제는 비핵화 프로세스와 연관된 게 아니라 (평화 협정 체결 이후) 전적으로 한미가 결정하는 것으로 김 위원장이 이해하고 있다”고 했다. 앞서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시절이던 2018년 3월 평양에서 김정은을 만나고 돌아와 “김 위원장이 예년 수준으로 한미 훈련을 진행하는 것을 이해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하지만 북한은 2018년 미·북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주요 한미 연합 훈련이 폐지되고 남은 훈련들이 대폭 축소됐는데도 비난을 계속했다. 지난 1월 노동당 제8차 대회에선 김정은이 직접 나서 “남조선 당국은 첨단 군사 장비 반입과 미국과의 합동 군사 연습을 중지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이날 김여정이 담화에서 ‘위임에 따라’라고 한 것도 주한미군 철수 요구가 김정은 뜻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북한은 지난 1일 연합 훈련 중단을 요구했을 때와 달리 이날 김여정 담화는 조선중앙TV를 통해 내보냈다. 북한 주민들에게도 담화 내용을 알리겠다는 의도다. 전직 통일부 관리는 “북한이 태도를 바꿨다면 문재인 정부를 우습게 본 것이고, 정부가 김정은의 발언을 분식·왜곡했다면 국민을 속인 것”이라고 했다.
북한은 이날 오후 군 통신선과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채널을 통한 정기 통화에 응답하지 않았다. 13개월 만에 복원된 통신선이 2주 만에 다시 불통이 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미국과의 갈등을 무릅쓰고 훈련을 대폭 축소하는 성의를 보였는데도 북한이 비난을 퍼부으며 남북 관계를 닫은 데 주목하고 있다. 북한이 모종의 필요에 따라 통신선을 잠시 복원한 것일 뿐 애초부터 대남 유화 국면을 오래 유지할 생각이 없었던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날 김여정은 “조성된 정세는 우리가 국가 방위력을 줄기차게 키워온 것이 천만 번 정당했다는 것을 다시금 입증해주고 있다”며 “국가 방위력과 강력한 선제 타격 능력을 보다 강화해나가는 데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의 핵 위협에 맞서기 위한 연례적 방어 훈련을 핑계로 핵·미사일 고도화를 정당화하는 모습이다. 전직 외교부 고위 관리는 “북한판 내로남불이 따로 없다”고 했다.
일단 합참은 이날 “북한군 특이 동향이 식별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지만 북한이 조만간 군사 도발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외교 소식통은 “식어버린 미국의 관심을 끌면서도 추가적인 제재를 피할 수 있는 수준의 도발을 노릴 것”이라고 했다.
군사 전문가들은 북한이 핵 추진 잠수함, 전술핵, 극초음속 무기, 정찰 위성, 무인 정찰기 등에 대한 개발 성과를 과시할 가능성을 거론한다. 모두 김정은이 지난 1월 당대회 당시 공개적으로 개발을 지시한 무기들이다. 신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또는 장사정포·방사포 등을 발사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앞서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은 지난 3일 국회 정보위에 출석해 “연합 훈련을 예정대로 실시하면 북한이 SLBM을 발사하는 등의 도발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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