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자존을 보여주고 자결한 조선의 마지막 선비
「난리 통에 어느새 머리칼만 희어졌구나
몇 번이나 목숨을 버리려 하였건만 그러지 못 하였네
하지만 오늘만은 진정 어쩔 수가 없으니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득한 하늘을 비추는구나」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의 절명시(絶命詩) 가운데 첫 수다.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의 주권이 박탈되자 열흘 뒤인 9월7일 전남 구례 자택에서 다량의 아편을 소주에 타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절명시 4수와 자식 앞으로 유서를 남겼다.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나는 위로 황천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한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황현은 전라도 광양현 서석촌의 가난한 시골 선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총명하여 일찍 이름이 났다. 나이 스물에 청운의 뜻을 품고 상경하여 문명이 높던 강위(姜瑋)·이건창(李建昌)·김택영(金澤榮) 등과 깊이 교유했다. 1883년(고종 20) 보거과(保擧科) 초시에 장원을 했으나 출신이 너무 한미하여 2등으로 내려앉고 말았다. 조정의 부패를 절감한 그는 관직에 뜻을 잃고 낙향했다가 1888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해 생원회시에 응시, 장원을 차지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이후 청국의 간섭 아래 수구파 정권의 무능과 부정, 가렴주구가 극심하던 때였다. 매천은 벼슬의 뜻을 접고, 두문불출했다. 서울의 벗들이 출사를 얘기하자 그는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를 도깨비 나라의 미치광이들(鬼國狂人) 속으로 끌어들이려 하느냐’는 독설을 남기고 재차 낙향한다. 구례에 작은 서재를 지어 3천여 권의 서책을 쌓아놓고 독서와 함께 시문, 역사와 경세학 연구에 전념했다.
한말의 학자 김택영은 ‘황현전기’에서 ‘악한 사람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했으며, 오만스러운 기백이 있어 남에게 허리 굽혀 복종하지 않았다. 교만한 고관들을 만나면 얼굴을 돌리고 그들을 물리쳤다. 평생 사는 동안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좌천을 당하거나 귀양 가거나 죽거나 상을 당하게 되었을 때, 천리를 걸어서 위로한 적이 많았다. 책을 읽다가 충신이나 지사가 곤액을 겪거나 원통한 일을 당하게 되면 눈물을 줄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학문은 고금을 통하였지만, 시속의 학자들을 따라 노니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황현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갑오경장, 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자 급박한 위기감을 느끼고 후손들에게 남겨주기 위해 경험과 견문을 바탕으로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을 저술했다. <매천야록>은 1864년~1910년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쓴 총 6권7책의 기록물이다. 위정자들의 잘못이나 고종·명성황후의 행적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서양열강을 특별히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았으며 조선이 대국으로 섬겼던 청나라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등 합리주의적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한말 역사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오하기문>은 조선후기~대한제국 기간 동안의 당쟁 및 세도정치, 동학농민전쟁 등에 관하여 서술한 역사서이다. 정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참신하고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으며, 관변(官邊)의 이면사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제목 ‘오하기문(梧下紀聞)’은 오동나무 아래서 이 글을 기술하였다는 데서 유래하는데, 그 오동나무가 지금도 매천사에 우뚝 솟아있다.
동학농민혁명운동에 대한 기록인 <동비기략>은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1902년 후학양성을 위해 향촌의 뜻있는 사람들과 자금을 모아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에 호양학교(壺陽學校)를 세웠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통분을 감추지 못하고 당시 중국에 있던 김택영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망명을 시도하다 실패하기도 했다. 1906년 을사늑약에 항거한 대표적 의병장 최익현 선생이 대마도에서 단식 후유증으로 절명하여 시신으로 돌아오매 먼 길을 달려가 시 <곡면암선생> 6수를 쓰고 조상했다. 「…고국 산천에는 빈 그림자만 푸르른데/ 슬프다 선생의 뼈를 어디에 묻으리오…술 떨어진 서대(西臺)에 해는 쓸쓸히 지고/ 사고(송나라 시인)의 머리에는 눈발만 그득해라」
그로부터 4년 뒤 을사늑약의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구례 대월헌에서 자결했다. 벼슬을 하지 않았으니 죽어야 할 의무는 없으되 망국에 이르러 절명하는 선비 하나 없다면 애통한 노릇이 아닌가,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라는 그의 마지막 말이 선비의 서늘한 자존을 보여준다.
지리산 서쪽 끝자락에 매천사가 있다. 이곳에는 당시 최고의 초상화가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가 남아있다. 황현이 자결한 이듬해 그의 사진을 보고 추사(追寫)한 것이다. ‘황현은 이마가 넓은 데다 눈썹은 드물었으며, 눈은 근시인데다 오른쪽으로 꺾어졌다. 사람됨이 호방하고 시원스러웠으면서도, 모가 지고 꼬장꼬장했다’는 김택영의 말처럼, 유건에 학창의를 입고 돋보기를 쓴 채로 매섭게 정면을 쏘아보는 형형한 눈빛은 그가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림은 실제 인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사실적 묘사가 뛰어나다. 보물 제1494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매천사가 건립되었고,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이광이 작가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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