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위로' 고진하 시인 "골고루 가난해지기를 빌고 또 빈다" [2021 박인환상]

선명수 기자 2021. 8. 10.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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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국 문단의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한 박인환 시인(1926~1956)의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해 제정된 박인환상의 제2회 수상자(시 부문)로 시집 <야생의 위로>를 펴낸 고진하 시인이 선정됐다. 심사위원회(허영자·김명인·강창민 시인, 최돈선 춘천문화재단 이사장, 오형엽 문학평론가)는 “삶의 체험과 시를 일치시키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특별한 힘으로부터 강력한 시적 밀도와 강도를 확보한 시집”이라고 수상작 선정 이유를 밝혔다. 박인환상은 인제군문화재단과 경향신문이 공동 주관하며, 시 부문 상금은 3000만원이다.
시집 <야생의 위로>로 제2회 박인환상을 수상한 고진하 시인. 박인환상운영위원회 제공


시인 고진하(68)는 강원 원주 명봉산 자락의 낡은 한옥 ‘불편당(不便堂)’에 산다. 작은 불편도 견디지 못하는 현대사회에서 기꺼이 불편을 즐기자는 뜻에서 지은 당호다. 산과 들을 다니며 들풀과 잡초를 관찰하고, “지구 별을 살리는 식물들과 사귀며, 그 고요한 순례”(‘시인의 말’ 중)에 자주 동행한다. 그렇게 야생에서 들은 이야기가 시(詩)가 된다.

올해로 2회째를 맞은 박인환상(시 부문)을 수상한 고진하의 <야생의 위로>(천년의 시작)는 그 제목처럼 ‘야생’의 지혜에 귀 기울인 시집이다. 시인은 “자연의 이자(利子)로 살면서 느끼는 기쁨과 보람과 자부심, 자연의 원금을 더 이상 낭비하지 않으려는 고된 몸부림을 담아내려 했다”고 시집을 소개한다.

그래서인지 <야생의 위로>에는 이름 없는 들풀, 나무, 농사와 같은 온갖 ‘식물성’ 이야기가 가득하다. 시집의 문을 여는 시 ‘표절 충동’에서도 시인의 이런 가치관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시인은 이미 낡아 있거나 ‘이승의 리듬’이 아닌 타인의 예술이 아니라, 야생이 지닌 공생의 삶을 ‘표절’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꽃의 꿀을 따 먹으면서도/ 꽃에 이로움을 주는/ 나비나 꿀벌의 삶은 베끼고 싶거니// 이런 생물들의 꽃자리가 되어주는/ 대지의 사랑은 베끼고 싶거니.’

또 다른 시 ‘난 푸른 혁명의 뇌관을 갖춘 씨앗’에선 “천지 사방 풋것들을 펑펑 터뜨리”는 씨앗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런 “씨앗을 닮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씨앗이 함축하는 신비는 사랑의 신비이고/ 신의 신비이기도 하니까.’ 고 시인은 “자연과 어우러지는 공생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다”며 “지구 위에 살아 있는 생명들을, 돈을 얻기 위한 자원이란 생각에서 벗어나 경외와 자비심으로 보듬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강원도 영월 출신인 고 시인은 “평생 강원의 산자락을 떠돌며 살았다”고 한다. “늘 산을 바라보며 자랐던 어린 시절의 감성이 강원도의 산야를 평생 터전으로 삼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는 그는 10여년 전부터 70년 된 낡은 한옥 ‘불편당’에 살고 있다. 그는 “불편한 생활도 익숙해지면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말한다. “오늘 우리가 사는 문명세상은 편리와 속도와 효율이란 가치를 중시합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현대인들은 작은 불편도 견디지 못합니다. 편리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 지나치다 보니 우리가 사는 유일한 터전인 지구를 파괴하고 환경재앙도 겪게 되었죠. 그래서 대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는 중에 ‘불편’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불편을 억지로 견디며 사는 게 아니라 불편을 즐기면서 살자! 이런 생각 끝에 당호를 ‘불편당’으로 짓게 됐습니다.”

시집 2부에는 ‘불편당 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시들이 여럿 수록돼 있다. 잡초를 뜯어 밥상에 올리며 “엄청 사치하게 사는 거”라며 즐거워하고, “지하의 예술가” 지렁이들을 오래 들여다 보는 소농의 일상이 이 일기 속에 담겼다. 이런 ‘자발적 가난’의 삶 속에서 시인은 “골고루 가난해지기를 빌고 또 빈다”. 특히 잡초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고 시인은 아내 권포근씨와 함께 잡초 요리서 <잡초 치유 밥상> 등을 펴내기도 했다. “잡초에 대한 관심은 귀농 귀촌 이후에 생겼습니다. 그래서 잡초를 지속적으로 공부하게 됐고, 앞으로 식량 위기 같은 것이 오면 잡초가 미래 먹거리가 될 거라는 확신에 이르렀죠. 또 건강한 흙은 우리 삶의 모태이고, 그 건강한 흙을 만들어주는 것이 어두컴컴한 땅 속에 사는 지렁이라는 걸 모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지구의 동물들 가운데 지렁이 만큼 큰 일을 하는 존재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텃밭에 농약과 비료를 뿌리지 않고 자연농을 하고 있어요. 지렁이도 살게 하고 땅도 살리려구요. 매일같이 텃밭을 일구며 떠오르는 것들이 이번 시집의 영감으로 작용한 것 같네요.”


고 시인은 시집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야생’을 꼽으며 ‘야성의 회복’을 강조했다. “문명의 이기에 휘둘리면서 우리는 야생에서 멀어졌고, 그 결과 우리는 야성을 잃어버렸죠. 원초적 본능인 야성을 회복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질적으로 훨씬 성숙해질 겁니다. 제가 쓴 시에도 나오지만, 저는 제비나 고양이나 야생의 풀들을 제 삶의 스승으로 여기고 야성의 날개를 접지 않고 살려 합니다. 물질의 낭비는 줄이고, 시와 꽃과 예술과 하느님 같은 비물질을 많이 낭비하려고 합니다.”

고 시인은 신학을 공부하고 40년 가까이 목회를 하고 있는 개신교 목사다.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해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얼음수도원> <거룩한 낭비> <명랑의 둘레> 등 여러 편의 시집과 산문집을 출간하는 등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고, 김달진문학상, 영랑시문학상, 강원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고 시인은 “저에게 문학은 종교의 형식이 되고, 종교는 문학의 내용을 풍성하게 해준다”고 말했다. “모든 경전이 그렇지만 성경 역시 문학의 비중이 아주 큽니다. 문학이 경전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은 되죠. 예수가 한 말씀을 봐도 문학적인 비유와 상징적 표현이 주를 이뤄요. 목회자 역시 늘 설교를 통해 하느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데, 그 설교의 형식은 문학적 깊이를 담보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문학공부에 열중하다 보니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됐습니다. 저에게 문학과 종교는 샴쌍둥이처럼 붙어있죠.”

“흔한 것이 귀하다.” 고 시인은 이 화두를 붙잡고 살아간다고 했다. 잡초를 공부하며 깨닫게 된 것이라고 한다. 박인환상 수상을 “더 좋은 시를 쓰라는 격려와 응원으로 받아들였다”는 시인은 앞으로도 ‘흔한 것들’에 감사하며 그런 마음을 담은 글을 쓰겠다고 했다. “태양, 공기, 물, 잡초 등 흔한 것들에 대해 늘 고마워하고 살면서 이 테마로 쉽게 읽을 수 있는 산문집을 내려고 해요. 이번 시집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한 야생 혹은 야성의 회복에 대한 시집도 준비하려 합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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