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만능시대’ 돌입한 프로 바둑계

이홍렬 바둑전문기자 2021. 8. 10.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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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바둑] 스폰서·팬 모두 최고 스타 원해
상위랭커 확보하려 2·3중 장치
농심배는 첫 1~5위 드림팀 구성
“韓·中·日 통합 랭킹 구축해야”

프로기사들은 매달 5일이 되면 대국날 이상으로 긴장한다. 지난 한 달 간의 전적을 토대로 자신의 위치가 재조정된 순위표가 발표되는 날이다. 한 30대 프로는 “새 랭킹이 나올 때마다 학생시절 중간고사 성적표를 받아들 때 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기사들이 랭킹에 민감해진 것은 바둑계 상위랭커 선호도가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기전 스폰서들은 유명기사 확보를 위해 랭킹에 전폭 의존하기 시작했다. 국제대회 출전자도 랭킹 순으로 칼 같이 끊는다. 시드가 2장이라면 3위 이하는 예선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종의 ‘이력서’가 된 랭킹 리스트를 가리켜 “조선조 때의 계급 품계가 떠오른다”는 기사들도 있다.

제23회 농심배 한국 대표에 와일드카드로 뽑힌 원성진 9단. 한국 5위인 그의 합류로 올해 대표팀은 톱 랭커 1~5위가 포진한 ‘드림팀’을 구성하게 됐다. /한국기원

23회째를 맞는 농심배가 사상 첫 1~5위 드림팀을 구성하게 된 것이 이런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난달 랭킹 차등 방식으로 3차에 걸쳐 선발전을 치른 결과 2~4위 랭커 박정환 변상일 신민준이 각각 2승 만으로 통과됐다. 여기에 1위 신진서가 예선 면제(시드)를, 5위 원성진이 와일드카드로 합류한 것.

요즘 한창 뜨거운 여자 2위 다툼도 결국 랭킹 싸움이다. 지난 달 오청원배 때 1·2위 최정과 오유진이 랭킹 시드를, 3위 김채영은 상비군 쿼터를 받은 반면 4위 조승아는 험한 국내 선발전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8월 랭킹에선 2·3위가 바뀌었고 3·4위간 점차는 1점으로 줄었다. 지형도가 바뀐 여자 랭킹 경쟁은 갈수록 가열될 조짐이다.

신설 국내 대회인 우슬봉조배는 1차에서 최상위 50명, 2차에선 최상위 10명을 빼고 예선을 치렀다. 여기서 살아남은 기사들이 최강자 10명과 마지막 3차 예선을 벌여 10명을 추린 다음, 1·2위 신진서·박정환을 포함시켜 본선 멤버 12명을 확정했다. 유명 스타가 실수로 탈락할세라 3중 안전 장치를 설치한 것.

랭킹 비중이 커진 이유는 철저한 시장(市場) 원리에 기인한다. 공급자(스폰서)는 수요자(팬)가 좋아하는 재료(스타 기사)로 최상품을 내놓아야 상품 가치가 높아진다. 선수 입장에선 랭킹이 곧 계급장이 될 수밖에 없다. 남녀 최고스타 신진서·최정은 모든 기전 예선을 면제받는 ‘전 구간 프리패스’를 누리고 있다.

최상위급 아닌 중위권 기사들에게도 랭킹은 중요하다. 선발 절차가 랭킹대(帶) 별로 세분돼 한 순위 차이로 명암이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어중간한 타이틀 하나 따는 것 보다 부지런히 랭킹 점수를 쌓아 신분을 높이는 게 더 유리할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번 농심배 예선 돌풍의 주역이었던 김창훈의 예를 보자. 그는 뭇 강자들을 상대로 8연승 후 결승서 패배, 태극마크를 눈앞에서 놓쳤다. 작년 규정이었다면 대표로 뽑혔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하지만 예선 과정에서 그는 랭킹 폭등(109위62위)이란 소득을 얻었고 미래를 기약할 밑천(?)을 확보했다.

2009년 첫 도입 당시 기사 랭킹제는 홍보용 자료에 불과했으나 이후 다양한 용도로 활용돼 오고 있다. 2019년 기사 공청회를 거쳐 2020년 기전 가중치를 대폭 축소하는 등 변화 속에 현재의 랭킹제가 정착했다. 요즘은 랭킹위원회 관리 아래 자동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

완벽한 랭킹제를 위해선 한 중 일 3국 공동운영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한·중 간 협조 논의는 중단됐고, 일본은 자국 랭킹 도입마저 미루고 있다. 한국기원 차영구 홍보팀장은 “랭킹 비중이 높아지면서 공정성·객관성 확보에 최대한 주안점을 두고 운영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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