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충한 고시촌에 아이디어와 기술이 넘쳐난다고? [스타트업 리포트]
서울 관악구 호암로에 한국판 '스타트업 밸리'를 꿈꾸는 '관악S밸리'가 들어선다. 관악S밸리는 지방자치단체, 학교, 기업이 함께 만드는 신생기업(스타트업) 육성 단지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이 근처에 있는 실리콘밸리, 중국 베이징의 칭화대와 인접한 중관춘(中關村)처럼 서울대를 끼고 단지를 조성해 참신한 아이디어와 뛰어난 기술로 승부를 거는 스타트업들이 모이도록 하겠다는 전략이다.
첫 단추를 꿴 것이 지난달 8일 개소한 관악S밸리 스타트업 센터다. 관악구와 서울대, KT, KB금융지주가 공동으로 만든 이곳은 스타트업 육성을 위한 관(지방자치단체), 학(대학), 민(기업) 협력의 대표적 사례다. 정보기술(IT)과 금융 등 이종산업 간 공동 센터를 만든 것도 처음이다. 문을 연 지 한 달째인 이곳에 이미 14개 스타트업이 입주해 있다. 미래의 구글과 아마존을 꿈꾸는 스타트업들이 모인 관악S밸리 스타트업 센터를 찾아가 봤다.
고시촌 공동화 막는 캠퍼스 타운
지하 1층, 지상 6층의 총 7개층 규모인 관악S밸리 스타트업센터는 3개 기업이 시설을 공동 운영한다. 지하 1층과 지상 1층은 마이워크스페이스가 자리를 잡고 스타트업들에 공간을 빌려주는 공유 사무실을 운영한다. 지상 2~4층은 KT의 '디지코 KT 오픈랩', 지상 5~6층은 KB금융지주의 '관악 KB 이노베이션 허브'가 위치한다.
운영 주체와 공간은 분리돼 있지만 이들은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서로 시설을 공유하며 스타트업 간 협력, 공동 행사 등을 추진한다.
센터가 자리 잡은 곳은 한때 고시촌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이곳에 센터를 만들었을까.
KT 오픈랩 운영을 맡은 KT 오픈 이노베이션 팀장인 오세나 박사는 "사법시험이 사라져 고시 준비생들이 빠져나가면서 지역 공동화 현상이 발생했다"며 "이를 해결하고 실리콘밸리나 중관춘처럼 주요 대학을 거점 삼은 캠퍼스 타운을 조성하기 위한 조치"라고 말했다. 그래서 S밸리라는 이름에 서울대, 신림동, 스타트업을 상징하는 중복된 의미를 담았다. 오 박사는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 인천창조경제혁신센터 개설에 참여해 지금도 운영을 맡고 있는 스타트업 육성 센터 전문가다.
관악S밸리는 센터가 전부는 아니다. 센터 맞은편에 유사한 시설들이 추가로 들어선다. KT 오픈 이노베이션팀의 김준학 차장은 "관악구와 서울대는 이 지역을 스타트업 단지로 집적화한다"며 "9월 이후 우리은행을 비롯해 몇 군데에서 센터와 유사한 시설을 추가로 몇 개 더 설치해 서로 시설을 공유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료 간식 제공에 로봇이 방역 소독
KT 오픈랩은 입주 스타트업들에 업무 공간을 무료로 빌려 준다. 기본 입주 기간은 1년이지만 원하면 최장 3년까지 머무를 수 있다.
이곳은 입주 스타트업들의 기술을 운영에 도입한 독특한 공간이다. 공간 지능화 기술이 적용돼 사람이 필요 없고 24시간 비대면으로 운영된다. 오 박사는 "출입부터 각종 시설 관리를 모두 비대면으로 한다"며 "로봇이 1층에서 아이스크림을 팔고 방역 소독까지 한다"고 강조했다.
2층 입구에 들어서면 회의실과 영상 스튜디오, 휴게실 좌석, 사물함 등을 예약하는 터치 스크린과 QR코드 방식의 종합 안내 시스템이 설치돼 있다. 이 시스템은 센터에 입주한 인공지능(AI) 스타트업 파이미디어랩이 개발했다.
재미있는 것은 종합 안내 시스템에서 예약하면 해당 공간과 좌석에 설치된 전자 명패에 자동으로 예약자명이 표시된다. 전자 명패 역시 파이미디어랩이 만들었다.
각층 휴게실에 마련된 식음료와 간식은 입주 스타트업 직원들에게 무료로 제공된다. 이곳에 입주한 파프리카 데이터랩의 김유빈(22) 대표는 "무상으로 제공되는 빵과 시리얼, 커피 등으로 아침을 해결하는 스타트업 직원들이 많다"며 웃었다.
모든 사무실에 창문이 있는 점도 센터의 특징이다. 오 박사는 "다른 공유 사무실과 달리 입주 사무실마다 창문이 있어서 쾌적한 근무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의외로 테스트베드 같은 실험실이 보이지 않았는데 서울대 시설을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 박사는 "서울대에 설치된 AI와 로봇 관련 시험시설들이 많아서 고민 끝에 제외했다"며 "센터에 입주한 스타트업들은 서울대 관련 시설을 무상 이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AI, 로봇, 헬스케어, 프롭테크 스타트업 육성
센터 운영을 맡은 KT와 KB금융지주는 각각 주제를 갖고 스타트업을 육성한다. KT 오픈랩은 AI와 로봇, 건강관리에 특화돼 있고 KB금융지주는 AI, 스마트시티, 부동산기술(프롭테크)에 초점을 맞췄다.
양 사는 현재 각각 7개 스타트업을 선정해 무상으로 공간을 제공한다. KT는 다음 달에 로봇 사업 공모전을 거쳐 3개 스타트업을 추가로 선정해 총 10개사를 입주시킬 예정이다. 매년 선정하는 스타트업 숫자와 주제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오 박사는 "KT의 신사업 방향에 따라 선정 주제가 달라질 수 있다"며 "하지만 기술 기반 스타트업을 뽑는 방침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KT는 향후 사업과 관련 있을 만한 곳을 골라서 전략적 투자까지 한다. 오 박사는 "계열사 가운데 KT인베스트먼트에서 2,000억 원 규모의 스타트업 투자 펀드를 운영한다"며 "전략적 투자 또한 센터의 주요 목적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KT 그룹의 사내 벤처투자사(CVC) 역할을 하는 KT인베스트먼트는 시리즈A 단계의 스타트업 에 투자를 하다가 최근 조기 발굴로 방향을 틀어 창업 3년 미만 스타트업까지 투자 대상을 확대했다.
KT 오픈랩은 다른 육성센터와 달리 KT와 협력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다. 오 박사는 "입주 스타트업들이 차이나텔레콤, NTT도코모, 프랑스텔레콤 등 KT와 협력 관계인 해외 통신업체들을 통해 해외 사업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며 "메르세데스 벤츠, 바이엘 등 다른 산업체들도 오픈랩에 관심이 많다"고 주장했다.
KT는 연내 오픈랩 증설을 검토 중이다. 오 박사는 "우리나라 전체가 실리콘밸리가 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정부와 기업들의 스타트업 육성 의지가 강하다"며 "KT도 오픈랩 센터를 연내 추가 증설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수원 까마귀떼 쫓은 이색 스타트업 파프리카 데이터랩도 입주
KT 오픈랩 센터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스타트업이 직원 7명의 파프리카 데이터랩이다. 이화여대 경영학과 4학년생인 김유빈 대표가 지난해 1월 창업한 이 곳은 특이하게도 이용자가 생성한 데이터를 필요로 하는 곳에 판매하고 돈을 버는 거래 서비스를 지난해 12월부터 시작했다. 김 대표는 "스마트폰을 쓰면서 많은 데이터를 생성하는데 아직까지 국내에 데이터를 거래하는 곳이 없다"며 "데이터를 팔면 현금성 포인트를 주는 '캐다' 앱을 지난해 말에 선보였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수원 까마귀떼 퇴치 작전이 대표적 데이터 거래사업이다. 수원시는 겨울철이면 시베리아에서 날아드는 까마귀떼 때문에 골치를 앓는다. 까마귀들의 배설물이 쌓여 차량을 부식시킬 정도여서 수원시의 고민이 크다.
김 대표는 지난해 말 수원시를 찾아가 ‘캐다’ 앱을 이용한 까마귀떼 퇴치 작전을 제안했다. 김 대표는 “이용자가 스마트폰으로 까마귀떼가 모인 곳에서 사진을 찍어 앱에 올리면 자동으로 위치정보가 전달돼 배설물 제거팀이 출동한다”며 "한 번 촬영에 500원을 보상했더니 초반 8,000장의 사진이 올라올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고 강조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정확한 데이터를 가려내는 분석 능력이다. 이를 위해 김 대표는 모니터 줄무늬 현상인 모아레 패턴을 자동 감지하는 AI 기술을 데이터 분석에 적용했다. 김 대표는 "보상을 노리고 모니터에 까마귀 사진을 띄워 이를 찍어 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자체 개발한 AI 엔진이 이를 모두 찾아냈다"고 말했다.
현재 캐다 앱은 2만3,000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김 대표는 "다양한 기업과 단체들이 보상을 제공하고 데이터를 모으는 사업을 함께하고 있다"며 "KT와 방대한 데이터를 활용한 스마트 시티 관련 사업을 논의 중"이라고 설명했다.
김 대표의 목표는 "데이터계의 아마존이 되는 것"이다. 그는 "많은 데이터를 쉽고 저렴하게 확보해 힘을 발휘하는 곳이 아마존"이라며 "앞으로 개인이나 기업이 자유롭게 데이터를 사고팔 수 있는 온라인 장터를 만들겠다"고 계획을 밝혔다.
부족한 지역 접근성 극복이 과제
센터의 과제는 지역의 낙후성을 극복하는 것이다. 4차선 도로를 끼고 있는 이곳은 지하철 역이 자동차로 10분 이상 가야 할 만큼 멀고 택시를 타도 주변에 목표 건물을 얘기하기 힘들 만큼 후미진 곳에 있다. 그만큼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센터에서는 내년 개통 예정인 신림선 경전철에 기대를 걸고 있다. 오 박사는 "스타트업 육성 센터를 지을 때 중요한 것이 직원 채용과 관련된 대중교통"이라며 "이 지역은 지하철 역이 멀지만 내년에 걸어서 1분 거리에 경전철 역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또 서울 강남이나 성수동에 비해 공유 사무실도 부족하다. 센터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마이워크스페이스와 손잡았다. 오 박사는 "이 동네는 수익을 낼 만한 스타트업 수요가 없어서 공유 사무실이 없었는데 마이워크스페이스를 통해 지역적 한계를 극복했다"며 "대신 강남, 성수동보다 임대료가 저렴한 이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센터는 스타트업 발굴의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 오 박사는 "KT와 KB가 스타트업 육성을 위한 일종의 메기 역할을 하게 됐다"며 "다른 기업들도 지자체, 학교와 손잡고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모델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센터 설립의 의미를 부여했다.
최연진 IT전문기자 wolfpac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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