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은메달이라 죄송하다'는 중국

이귀전 2021. 8. 8.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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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대만에 진 탁구·배드민턴팀
선수들 자책.. 中 누리꾼도 질책
맹목적 애국주의 스포츠에 영향
내년 베이징서도 표출될까 우려

“은메달이라 죄송합니다.”

듣는 사람조차 민망하다. 전 세계에서 난다 긴다 하는 이들이 모인 올림픽이다. 전 세계에서 2등을 했으니 손꼽히는 실력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런데 나온 말이 “죄송합니다”다.
이귀전 베이징 특파원
‘1등을 향한 끝없는 욕심’으로 이해하려다가도, 태어나면서부터 1등이 아니라 힘들게 노력해서 저 자리에 올랐는데 기쁨이 아닌 속죄의 눈물을 흘리는 게 당최 이해가 안 된다. 누구보다 즐길 자격이 충분한데도 말이다.

지난달 26일 탁구 혼합복식 결승에서 중국의 쉬신-류스원 조는 일본의 미즈타니 준-이토 미마 조에 패해 은메달을 땄다. 류스원은 “팀을 망친 것 같다. 정말 죄송하다”고 울먹이며 사과했다. 쉬신도 “중국 팀 전체가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고 자책했다.

선수들이 패배의 아쉬움이 너무 커 자책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당연히 중국 팬들이 “괜찮다. 열심히 싸웠다”며 위로해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 등에서 선수에 대한 격려는커녕 “탁구 혼합 복식팀이 나라를 망쳤다”며 질책이 이어졌다.

배드민턴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지난달 31일 남자복식 결승에 진출한 중국의 리쥔후이-류위천 조는 대만의 왕치린-리양 조에게 패했다.

일국양제(한 국가 두 체제)를 핵심 이익으로 내세우는 중국과 독립을 주장하는 대만 간 관계는 매우 불편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만에 패한 중국 선수들은 ‘조국을 배반’한 정도의 잘못을 저지른 상황이 됐고, 한순간에 역적이 됐다. 중국 누리꾼들은 웨이보에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너희들은 전혀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대만에 지다니 투지도 없다, 수치다”, “대만 국가를 들으려고 일부러 졌나” 등 비난을 쏟아냈다.

패배한 중국 선수들만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다. 중국팀을 이기고 금메달을 딴 일본, 대만 선수들에게도 트위터 등을 통해 악성 문자가 날아갔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선수에 대한 비방·악플 사례에 대한 법적 대응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금메달을 딴 중국인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 사격 선수 양첸은 도쿄올림픽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었다. 금메달을 따자 그녀가 한 머리핀이 인기를 끌 정도로 영웅이 됐다. 하지만 과거 웨이보에 올린 나이키 신발 모음 사진 때문에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나이키는 강제노동 등 인권 탄압을 이유로 신장위구르 지역에서 생산된 면화 사용을 금지했다. 중국에서 나이키 불매운동이 벌어진 가운데 양첸은 중국과 대척점에 있는 나이키 신발 사진을 올려놨다는 이유로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양첸은 게시물을 삭제했다.

이쯤 되면 ‘성적 지상주의’라고만 할 수 없다. 중국의 맹목적인 ‘애국주의’가 스포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중국 누리꾼의 이런 분위기가 외신 등을 통해 전 세계에 전파되자 국제적 이미지를 의식한 듯 중국 관영매체들은 “중국은 인간적인 모습, 도전정신 등을 더 높이 평가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려 분위기를 수습하려 시도했다.

개인과 국가의 성적을 동일시하며 선수들에게 엄청난 압박을 줬던 시절이 한국에도 있었다. 지금이야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가 너무도 당연하지만, 20∼30여년 전 한국에서도 “죄송합니다”란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성적 자체보다는 승부 자체를 즐기고, 결과보다는 열심히 한 선수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에 박수를 쳐주는 문화적 성숙함이 자리 잡았다. “높이 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는 남자 높이뛰기 4위 우상혁 선수의 당당함이 금메달리스트의 웃음만큼이나 자랑스럽다는 이가 적지 않다.

중국은 아직은 이런 성숙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특히 미국과 갈등이 심화하고, 공산당 100주년 등으로 중국 내 심화한 애국주의 발현이 올림픽에서도 그대로 표출되고 있는 셈이다. 불과 6개월 남은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중국 사회의 성적 지상주의와 애국주의가 그대로 드러날까 우려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중국은 독재체제이기에 공산당이 분위기를 바꿔야겠다고 하면 표면적으로나마 성숙한 관전 문화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이귀전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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