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도 그리운 북녘 가족.. 만날 기약 없지만, 간절한 마음 영상에 담아봅니다 [밀착취재]

허정호 2021. 8. 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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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영상편지 제작 현장
최선옥 할머니가 북에서 가져온 유일한 어머니(가운데) 사진. 전쟁이 터진 이듬해 1·4 후퇴 때 할머니가 피난을 떠나며 가슴에 품었는지도 잘 몰랐던 사진이라고 한다. 이산가족들 중 사연을 갖지 않는 이 없겠지만 사진 한 장 없이 남쪽으로 피난 와야만 했던 많은 이들이 여전히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처음엔 보이스피싱 아닌가 싶었지요. 엄마가 혼자서 결정했더라고요. 이산가족영상편지 촬영한다고… 걱정도 되고 해서….” 이산가족 영상편지를 제작하는 한준구 프로듀서, 대한적십자사 남북협력추진단 황상원 대리와 함께 경기 부천 중흥마을 최선옥(89) 할머니 집에 들어서자 둘째 딸 김수희씨가 말을 건넨다. 할머니는 “아이고 반가워요. 더운데 여기까지 찾아와주고.” 고마움이 그득 담긴 말을 보낸다.
통일부와 대한적십자사는 올해도 어김없이 이산가족찾기 신청자 중 영상편지 제작을 희망하는 이들을 찾아 사연을 영상으로 남기고 있다. 2005년부터 시작된 영상편지 제작은 지난해 기준으로 2만3073명의 이산가족이 자신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남겼다. 이산가족 영상편지는 분단으로 떨어져 있는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서로의 모습을 찾아보기 위해 시작됐다. 그렇게 시작된 편지는 남쪽에서만 벌써 2만 명을 넘어섰다. 남북 간에는 이산가족 영상편지 교환을 지속적으로 합의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2008년 20편을 교환한 것에 그치고 있다. 영상편지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겠지만 그 안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클지도 모른다.
최 할머니가 이산가족 영상편지 제작 및 정보활용 동의서를 읽고 있다. 영상편지를 제작하는 이산가족들 중 동의하는 분만 이산가족찾기 온라인 사이트에 영상이 올라간다.
한 PD가 할머니로부터 순서대로 이야기를 들으며 영상 촬영을 진행하고 있다.
영상편지를 촬영하는 백 할아버지 옆에는 대한적십자사에서 보낸 남북이산가족 실태조사 편지가 놓여있다.
“코로나19로 더욱 조심스럽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계신 곳으로 직접 방문하기 때문에 들어가기 전에 체온을 재고 장비 소독을 하고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예전에는 2~3인 1개 조로 움직였는데 지금은 혼자서 방문합니다. 사전에 약속을 해 방문하면 안 계신 경우도 있고 안 하신다고 하기도 하고… 지방은 특히 사시는 곳이 서로 멀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한 집 방문에 대략 1시간 정도 잡는데 올해는 팀을 나눠 1000명 정도 촬영할 예정입니다. 김제나 파주 같은 곳은 이산가족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라 한 동네에서 많은 분들을 뵙기도 합니다. 한번은 남파간첩이었다 전향하신 분인데 한밤중에 서울시청에서 보자고 해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불 꺼진 시청에 숨어 계셨더라고요. 왜 그랬냐니까 그곳이 마음에 들어서라고 하시는데 참… 다니다 보면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라고 한 PD가 미소를 띤다.
최선옥 할머니는 “평안북도 용천군이 고향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나이인 1951년 1·4 후퇴 때 내려왔어요. … 조상으로서 부끄럽습니다. 할 말이 없어요. 나라 걱정이 앞서서 그런가 봅니다”라며 영상편지를 맺는다.
할머니의 사연이 카메라에 담기고 있다. 5~6분 분량의 영상은 신청자에 한해 온라인에 남게 된다. 누구라도 볼 수 있다. 이산의 아픔이 영상으로 영원히 남게 된다.
이산가족 영상편지를 제작하는 케이피커뮤니케이션의 한준구 프로듀서가 경기 부천시 중흥마을에 사는 최선옥 할머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올해 제작되는 이산가족 영상편지 첫 번째 방문이다. 최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셨다.
백명국 할아버지가 사연을 말하고 있다. 백 할아버지는 전쟁포로로 잡혔다 다시 한국군으로 입대했다. 남쪽에서 형님을 극적으로 만났다. 올해 제작되는 이산가족 영상편지 두 번째 방문이다.
백 할아버지의 주름진 손.
“전쟁이 나 인민군으로 징집된 형님이 없어지는 바람에 도망자의 집이라고 불렸어요. 내가 대신 인민군으로 나가면 집안사람들 다치지 않겠다고 해 그랬지요. 그 뒤 전쟁포로로 잡혀 부산, 거제, 광주 포로수용소를 거쳤습니다. 다시 한국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남한으로 온 형님을 만나게 됐고 그렇게 그렇게 살아왔지요. 보고 싶은 사람들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냥 고향땅이라도 밟아보고 싶어요. 그게 제일 소원입니다.” 경기 부천시 범박동의 백명국(87) 할아버지도 영상 편지를 찍으며 바람을 얘기한다.
한 PD가 할아버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백명국 할아버지가 사연을 말하고 있다.
최 할머니가 자신의 사연을 한 PD에게 말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체온계는 필수품이다.
이산가족들의 영상편지는 남북이산가족찾기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영상편지 제작하신 분들 중 허락한 2809건이 영상으로 올라와 있다. 누구라도 이분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다. 5~6분 분량의 영상편지는 본인 소개(이름, 나이, 고향), 찾는 사람(관계, 이름, 나이), 찾는 사람과 추억, 고향에 대하여, 헤어질 때 상황, 헤어진 후 삶/현재 가족, 하고 싶은 말씀의 순서대로 진행된다.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 것이다.” 미국의 여류시인 엘라 휠러 윌콕스의 시처럼 외롭게 이산의 아픔을 간직한 채 평생을 살아온 이산가족들이 하루빨리 가족들을 만나고 고향땅을 밟을 수 있는 행복을 세상과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글, 사진=허정호 선임기자 hoy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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