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까마귀 울음을 우는 여자들

한겨레 2021. 8. 7.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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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말할 수 있었을 땐 용기가 없었고
용기가 생겼을 땐 인간의 말을 못해
눈과 몸으로 까마귀 소리 내는 마도
니나만이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
우리, 둘

영화 <우리, 둘>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강가의 작은 공원. 두 소녀가 술래잡기를 하고 있다. 한 소녀가 눈을 감고 숫자를 센다. 다른 소녀는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며 숨을 곳을 찾는다. 숫자를 다 센 술래가 눈을 뜬다. 몸을 돌려 숨은 소녀를 찾는다.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붙들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소녀는 공기처럼 사라져버리고 없다. 어디로 갔을까?! 술래가 입을 열어 사라진 소녀의 이름을 외쳤을 때,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까악.” 우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까마귀 울음소리다.

2021년 뜨거운 여름, 한국의 극장가를 찾아온 <우리, 둘>(2019)은 까마귀 소리로 우는 소녀의 얼굴에서 시작된다. 이어진 장면은 어두운 집안.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마도(마르틴 슈발리에)가 화장대 앞에서 거울을 보고 있다. 침대에 걸터앉아 연인의 모습을 지켜보던 니나(바르바라 주코바)가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 목에 키스를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열정적으로 서로에게 입을 맞추고 껴안는다. <우리, 둘>은 노년기를 살아가고 있는 두 여자의 성적 친밀성이 우정으로 포장될 여지를 깔끔하게 지우면서 관객들을 세월 속에서도 바래지 않는 사랑 이야기로 초대한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

프랑스의 작은 마을, 아파트 복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맞은편에 살고 있는 니나와 마도는 20년 동안 함께해온 연인이다. 은퇴를 맞이하여 두 사람은 로마로 이주해 로맨틱하게 여생을 보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여행 가이드로 평생을 떠돌며 자유롭게 살아온 니나와 달리 마도에게는 그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자식들이 있다. 실제로는 마도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면서도 굳이 건너편 집을 구해놓은 것 역시 자식들 눈가림용이다. 오랫동안 꿈꿔온 로마 생활을 위해서는 커밍아웃이라는 큰 산을 넘어야 한다.

생일을 맞아 마도는 집으로 아들과 딸을 초대한다. ‘말을 해야지, 말을 해야지….’ 굳은 결심과 달리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부터 마도의 외도를 의심했던 아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어머니가 ‘나쁜 남편’이었던 아버지에게 평생 헌신했던 ‘좋은 아내’였다고 믿는 딸에게도 도저히 사실을 고백할 수가 없다. 마도는 결국 커밍아웃을 접고 로마행을 포기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니나는 서운한 마음에 마도에게 험한 말을 퍼붓고, 말다툼 직후 마도는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며칠 후, 다행히 마도는 깨어나지만 인지능력과 운동능력이 많이 상한 상태다. 심지어 니나를 알아보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마도의 의사와 무관하게 가족들에게 두 사람의 관계를 밝힐 수 없는 니나는 조용히 마도의 집에서 나와 앞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하루아침에 집을 잃다니 황당한 일이다. 설상가상으로 마도가 퇴원한 후 그를 돌보고 있는 입주 요양보호사 뮤리엘은 ‘과도하게 친절한 앞집 여자’인 니나를 경계하고, 마도 곁에 머물지 못하도록 막는다.

두 사람의 관계에 위기가 닥쳐오기 전까지, 니나의 집은 전혀 화면에 공개되지 않는다. 두 사람만의 끈끈한 세계가 깨졌을 때에야 우리는 건너편 집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 집은 마도를 잃은 니나의 마음처럼 황량하다. 텅 빈 집에는 소파 하나, 테이블 하나, 침대 하나뿐이다. 두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들이 적재적소에 놓여 있는 따뜻한 마도의 집과는 사뭇 다르다. 하나의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두 채의 집은 마도와 니나가 살고 있는 세계 그 자체다. 마도의 집이 두 사람의 친밀성과 내밀한 관계를 품고 있다면, 니나의 집은 그 사랑을 세상에 내놓을 수 없는 현실을 외화한다.

단절과 고독의 공간으로 유폐된 니나가 마도와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작은 문구멍을 통해 마도의 집을 “도둑”처럼 훔쳐보는 것뿐이다. 마도에게 가닿으려는 모든 시도는 뮤리엘에 의해서 차단된다. 마도를 향한 갈망으로 애끓던 니나는 마도를 되찾기 위해 금지된 문턱을 넘어 복도를 가로지르기로 한다. 그리고 뮤리엘이 지키고 있는 마도의 집에 몰래 숨어들기 시작한다.

영화 <우리, 둘>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우리, 둘>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우리, 둘만은 알고 있다

로맨스에 갑자기 스릴러와도 같은 긴장감이 도는 것은 이때부터다. 우리는 문득 당황한다. 뇌졸중 후 마도가 니나를 원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니나가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적절해 ‘보이는’ 선들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내 그런 당혹스러운 감정이란 두 사람의 공명(共鳴)을 감각하지 못하는 이들이 품는 의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준다. 영화는 그렇게 레즈비언 욕망을 ‘병적인 것’으로 그려온 스릴러 영화들이 펼쳐놓는 익숙한 긴장감을 패러디하고 가지고 놀면서 관객들을 니나의 마음속으로 초대한다. 마도를 빼앗긴 상황이야말로 니나에겐 연유를 알 수 없는 미스터리 스릴러인 셈이다.

뮤리엘에게 막혀 마도를 만날 수 없었던 어느 날 밤, 니나는 악몽을 꾼다. 꿈속에서 니나는 강가에서 술래잡기 중이다. 드디어 사라져버린 소녀를 찾았지만, 그는 이미 강에 빠져 주검이 된 채다. 빼앗긴 애인을 찾아 헤매야 하는 니나는 첫 장면의 술래처럼 영화 내내 까마귀 울음을 운다. 물론 영화에서 까마귀 소리로 우는 것은 비단 니나만은 아니다. 마도 역시 그렇다.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었을 때는 커밍아웃을 할 용기가 없었고, 드디어 용기가 생겼을 때는 인간의 언어를 사용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마도는 눈과 몸으로 까마귀 울음을 운다. 그리고 니나만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영화의 끝, 니나는 요양원에 갇혀 있던 마도를 구출해서 자신의 집으로 도망친다. 두 사람은 폐허와도 같은 그곳에서 서로를 껴안고 춤을 춘다. 그제서야 우리는 이해하게 된다. 어떤 호의적인 것도 남아 있지 않은 그곳에서, 까마귀 울음을 울며 함께해온 그 시간들 속에서, 마도와 니나는 비로소 “우리, 둘”이 되어왔음을. 마도의 집뿐만 아니라 니나의 집도 “우리, 둘”을 이뤄온 일부였음을. 그러므로 그것은 바꿔나가야 할 현실이지만 지워버리거나 묻어버려야 할 과거는 아님을.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손희정 영화평론가가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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