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마지막 순간, '일년 같은 하루'를 축복으로 채울 수 있을까

한겨레 2021. 8. 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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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 불가능' 상황에서 돌아본다
환자, 보호자는 지금 어떤 마음인지
가족과 마지막 함께할 수 있는 시간
어쩌면 절망만이 아니라 축복일 수도

[한겨레S] 남의 집 드나드는 의사 닥터홍
마지막 함께하기

환자는 객관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보호자는 어떤 마음인지, 그동안 어려움은 없었는지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는지. 그렇게 주위를 돌아보고 서로를 돌아보면 가보지 못한 길이 보이기도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진료 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돌볼지 걱정이었는데 선생님 말씀 들으니까 조금 안심도 되고 위로도 되었습니다. 다음 진료 때 뵙겠습니다.”

어려운 상황이었다. 70대 후반 진웅(가명)님은 와상 상태로 집에서 지내던 중 갑자기 호흡곤란이 찾아왔다. 보호자들은 진웅님을 모시고 119를 통해 응급실로 내원하였다. 오래 진행된 파킨슨 질환으로 거동이 어려운 상태였고, 삼킴 곤란으로 입으로 식사하기 어려워 2년 전부터는 위장관으로 식사를 직접 공급하는 위루관을 복부에 삽입하여 영양을 공급하고 있었다. 응급실에서는 시급히 기관 삽관을 하고 중환자실로 가야 한다고 했다. 보호자들은 그 말을 듣고 선뜻 결정을 하기 어려웠다.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순간 면회가 어렵고 혹시라도 상황이 나빠지면 임종 뒤에나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그간의 투병 기간을 떠올리며 더 이상 진웅님을 고생하게 하고 싶지 않아 “집으로 가면 죽어요”라는 의료진 말을 뒤로한 채 어렵사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환자의 상태가 다소 안정되었다. 사나흘 지내니 응급실 가기 전만큼은 아니지만, 호흡이 안정되고 상태가 조금 좋아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에서 가족들이 우리에게 연락을 주셔서 찾아뵙게 되었다.

주위를 돌아보고 서로를 돌아보면 가보지 못한 길이 보이기도 한다. 사진 홍종원 제공

살릴 수 없더라도 할 수 있는 일

혹시라도 응급실에서 바로 입원을 하셨다가 임종하셨으면 못 뵐 뻔했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난 진웅님을 이리저리 살폈다. 대화도 나눠보려 했지만 반응은 없었다. 호흡, 맥박이 불안하고 산소포화도도 낮아 객관적으로 임종을 앞두었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상태를 살피고 난 후 보호자님께 그간의 경과를 들었다. 치료되지 않는 파킨슨 질환부터 폐렴에 욕창에 입·퇴원을 반복했고 위루관을 삽입하여 식사를 대체하기까지 대략 오륙년의 과정을 들었다. 듣고 보니 응급실에서 집으로 돌아온 결정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2년 전 당시에도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위루관을 통한 연명치료를 이어가는 것이 맞을까 고민하셨다고 한다. 중환자실에 가고 기관절개 후 기관호흡까지 하려니 주저하였다. 가족들은 그동안 고생이 심했기에 임종하시더라도 편안히 모시고 싶다고 했다. 여전히 가족들은 진웅님을 잘 모시고 있는 건지 고민이 많다. “집으로 돌아온 것도 잘하신 결정이에요. 집에서 가족들과 지낼 수 있는 시간을 확보했어요. 하루가 될지, 일주일이 될지, 한달이 될지 모르지만, 이별을 앞두고 그간 서로의 마음을 나누면 좋겠어요. 마지막을 함께하는 기회를 확보했으니까요. 하지만 지난 주말에 응급실을 찾았던 순간처럼 분명히 응급 상황이 다시 올 거예요. 지금은 안정적이지만 갑작스럽게 상황이 변할 수 있어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셔야 해요. 위급한 상황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시구요.”

누구에게나 마지막은 온다. 누군가의 발걸음이 되어주던 지팡이도 마지막을 맞이한다. 긴 시간 누군가의 삶을 지탱해주어 고마운 마음에 애도를 표한다. 사진 홍종원 제공

다행히 무사히 두 달이 흘렀다. 그사이 꾸준히 찾아뵙고 영양 공급을 조절하며 어떻게 돌볼지 상의했다. 시간이 흐르니 조금은 안정을 찾았다. 위급한 상황이 온다면 어떤 의료적 처치를 내가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지만, 그 전까지 약물 조절을 통해 응급 상황을 예방하고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더 함께 지내실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의사로서 약을 처방하고 처치를 하는데 임종을 앞두고 약은커녕 물도 마시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력감을 느끼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보호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름대로 방향을 찾을 뿐이다. 그런데 그 과정 자체가 조금의 위로가 된다니 참 다행이다. 사람을 살릴 수도, 병을 치료할 수도 없는 순간이 오더라도 조금의 위로를 드릴 수 있다면 의사로서 약간의 역할을 하지 않나 싶다.

하루가 일년 같다는 말이 있다. 오래 함께 살았지만, 지금의 시간은 하루가 일년 같은 시간일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일년 같은 하루를 가족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그 시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조금의 도움과 위로를 드릴 수 있다면 다행이다. 임종이라는 끝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서로 존재의 의미를 상기하고 남은 이도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자양분을 얻을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짧은 시간이 우리가 확보해야 할 순간이다.

사람을 살릴 수도, 병을 치료할 수도 없는 순간이 오더라도 조금의 위로를 드릴 수 있다면 의사로서 약간의 역할을 하지 않나 싶다. 게티이미지뱅크

치료 불가능이 절망은 아냐

치료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 나에겐 매우 당황스러운 순간이다. 정답이 있지는 않다. 빠르게 판단하여 응급실로 내원하거나 입원 치료를 받도록 권유해야 할 순간도 있다. 가정방문하는 의사로서 삶의 끝자락을 마주하는 일이 참 어렵다. 대학병원에서도 종합병원에서도 요양병원에서도 암전문병원에서도 치료가 어렵다고 한 환자를 가정방문 의사인 나는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 걸까? 객관적으로 임종을 앞두었다고 볼 수 있는 상태에 놓인 분들, 병원에서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절망적인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순간 당황하지 말고 치료라는 본연의 역할을 잠시 접어둔 채 서로를 돌아본다. 환자는 객관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보호자는 어떤 마음인지, 그동안 어려움은 없었는지,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는지. 그렇게 주위를 돌아보고 서로를 돌아보면 가보지 못했던 길이 보이기도 한다.

선뜻 희망을 전하기는 어렵지만, 치료 불가능하다는 말이 결코 절망이나 포기로 치환되지 않음을 조심스레 말씀드린다. 역시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가족과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는 이 짧은 시간이 우리에게 축복일 수 있다. 나 역시 가는 이가 남은 이들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을 차분히 열어볼 수 있도록 나름의 역할을 하고 싶다.

찾아가는 의사 홍종원

남의 집을 제집 드나들듯이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방문을 허락하는 이들이 고맙고, 그들과 오랫동안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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