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조승우의 첫 사랑 짧은 글..그 감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르누아르의 명작

조성준 2021. 8. 7.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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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예술가의 사회-82] 오귀스트 르누아르 (화가, 1841~1919)

◆ 사랑의 순간

배우 조승우가 첫사랑에 관해 쓴 짧은 글이 있다.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 조승우는 키가 150㎝였다. 키가 작아서 교실 맨 앞자리에 앉았다. 그는 같은 반 여학생을 짝사랑했다. 그런데 그 여학생 키는 160㎝였다. 맨 뒷줄에 앉았다. 조승우는 고개를 돌려서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하지만 맨 앞줄에 앉았던 터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맨 앞줄과 뒷줄을 바꾸라고 했다. 기회가 왔다. 소년은 좋아하는 여학생을 마음껏 바라봤다. 수업 중 조승우는 눈 주위가 반짝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맨 앞줄에 앉은 여학생이 손거울을 통해 조승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둘은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쳤다.

조승우가 묘사한 사랑의 순간은 따스한 바람처럼 우리의 마음을 포근히 감싼다. 누구나 살면서 마법 같은 순간을 경험한다. 자질구레한 걱정거리를 떨쳐내고 오직 환희라는 감각만이 몸을 휘감는 시간. 사랑이 그런 선물을 주기도 하고,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자녀의 모습이 그런 평화를 안겨주기도 한다. 프랑스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 그림에는 바로 이런 감각이 녹아들어 있다.

르누아르 그림은 행복과 기쁨 그리고 편안함이 가득하다. 겨울 끝을 알리는 미풍처럼 감각을 간지럽힌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누군가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을 때처럼 마음이 뭉근해진다. 이 그림 앞에서 관객은 저마다 봄날을 떠올린다. 마법 같았던 순간이 아른아른 피어오른다. 마음의 모서리가 부드럽게 깎인다.

뱃놀이에서의 점심(1881) / 필립스미술관 소장
◆ 봄날을 포착한 화가

르누아르는 모네와 함께 인상주의 화풍을 이끈 화가다. 현대미술의 시작점인 인상주의를 딱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오랫동안 법처럼 지켜졌던 서양 회화 규칙을 부쉈다. 그들은 일단 화실을 뛰쳐나왔다. 오늘날에야 야외에서 자연을 관찰하며 그림 그리는 게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르누아르와 모네가 등장하기 전까지 화가들은 주로 실내에서 그림을 그렸다. 굳이 바깥에 나가 그림 그릴 필요가 없었다. 별 볼 일 없는 일상생활과 자연은 그림 소재가 아니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다르게 생각했다. 그들에겐 매일 마주하는 평범한 풍경도 근사한 재료였다. 왜 그랬을까. 오랫동안 화가들은 사물에 고유한 색이 있다고 믿었다. 예컨대, 장미는 빨간색이고 바다는 푸른색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 상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익숙한 동네 풍경도 새벽에 볼 때와 점심시간에 볼 때 온도가 다르다. 빛 때문이다. 똑같은 대상도 빛이 어떻게 떨어지느냐에 따라 시시각각 다르게 인식된다. 밝은 햇살 아래서 보는 장미와 안개 낀 날 보는 장미 색은 다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바로 여기에 주목했다. 그들은 빛이 선사하는 마법에 매료됐다. 빛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른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바로 이 변화무쌍한 세상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했다. 그리고 이 변화 한복판에서 사진기처럼 찰나의 순간을 '찰칵' 포착하려 했다. 결국 모네와 르누아르에게는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림 소재였다. 어디에든 빛이 있기 때문이다. 화실을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인상주의다.

모네는 빛 그 자체에 매달렸다. 그는 30년간 수련 시리즈만 250편 그렸다. 시간과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정원 풍경을 묵묵히 기록했다. 르누아르의 관심사는 달랐다. 그 역시 빛의 마법에 푹 빠진 화가였다. 하지만 르누아르가 포착하려 한 건 빛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화사한 햇살 아래에서 삶의 환희를 만끽하는 인간을 사랑했다. 그것을 그렸다. 르누아르는 누군가의 삶에 한 번쯤은 찾아오는 봄날을 포착한 화가다.

물랭 드 라 갈레트(1876) / 오르세미술관 소장
◆ 인상주의 친구들

르누아르는 1841년 프랑스 리모주라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석공이었고,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집은 가난했다. 당연히 그림 교육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가족은 파리로 이사를 했다. 열세 살에 르누아르는 도자기 공방에 취직했다.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업무를 맡았다. 그 일을 꽤 잘했고, 인정도 받았다. 자신의 재능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림에 재미를 붙인 소년은 일해서 번 돈을 탈탈 털어 틈나는 대로 미술 교습을 받았다. 실력은 빠르게 발전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뜨거운 열기는 프랑스에도 퍼졌다. 도자기 공방에도 기계가 도입됐다. 기계에 밀린 르누아르는 일자리를 잃었다. 그 이후로 몇 년간 이곳저곳을 떠돌며 그림 재능을 팔아 입에 풀칠했다. 그는 1861년 입학시험이 까다로운 에콜 데 보자르에 합격한다. 이곳은 예술가를 양성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운영하는 미술 교육기관이다.

르누아르는 한 화가의 화실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클로드 모네, 프레데리크 바지유를 만났다. 모네는 르누아르보다 한 살 많은 스물두 살이었다. 바지유는 르누아르와 동갑이었다. 세 사람은 금세 의기투합했다. 화실을 뛰쳐나와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들은 기존 회화 규칙을 좀처럼 따르지 않았다. 서서히 인상주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주류 미술계는 이 젊은 화가들을 괴짜라며 손가락질했다.

모네는 르누아르처럼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래서 모네와 르누아르는 마음 편하게 그림만 그릴 형편이 못됐다. 바지유는 달랐다. 그는 부유한 집안 도련님이었다. 의학 공부를 하면서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학생이었다. 바지유는 일부러 큰 화실을 구했고, 모네와 르누아르에게 작업 공간을 제공했다. 그림 재료를 지원해주기도 했다. 친구들이 생활고에 시달릴 때 그들의 그림을 사주기도 했다. 다정하고 사려 깊은 친구였다. 르누아르와 모네는 친구의 뒷바라지 덕분에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었다.

세 사람 중 먼저 두각을 드러낸 건 바지유였다. 그는 살롱전에서 가장 먼저 입상했다. 당시 파리 화가들에게 살롱전 입상은 최대 과제였다. 프로 화가로 인정받으려면 살롱전 입상은 필수였다. 르누아르와 모네는 앞서나간 친구를 보고 긍정적인 자극을 받았다. 세 사람은 파리를 함께 누비면서 그림을 그렸고, 서로를 북돋아 줬다. 그들은 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다. 이 반짝이는 우정은 1870년까지만 이어졌다. 프랑스는 당시 호시탐탐 영토를 넓힐 궁리를 하던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한다. 전쟁이 시작됐다.

피아노 치는 소녀들(1892) / 오르세미술관 소장
◆ 인상주의의 탄생

모네는 징집을 피해 런던으로 피란을 떠났다. 르누아르와 바지유는 전쟁에 참전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그림 그리기뿐이었던 젊은 예술가들 손에 총이 쥐어졌다. 이 전쟁은 10개월 만에 끝났다. 르누아르는 살아남았고, 파리에 돌아왔다. 바지유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스물아홉 나이로 전사했다. 친구를 잃은 르누아르는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림뿐이었다.

모네 역시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모네와 르누아르를 주축으로 젊은 무명 예술가가 뭉쳤다. 그들은 번번이 살롱전에서 퇴짜를 맞은 화가들이었다. 이 젊고 발칙한 예술가들은 아예 살롱전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1874년 그들만의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는 모네, 르누아르, 바지유 세 사람이 과거부터 구상했었다. 바지유가 떠난 후 모네, 르누아르는 친구의 뜻을 이어받아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 유명한 인상주의전은 이렇게 열렸다. '인상주의'라는 용어가 나온 것도 이 전시회를 통해서다. 전시에 참여한 무명 화가 중에는 드가, 세잔도 있었다.

앞서 설명했듯 모네는 빛 그 자체에 매달렸고, 주로 자연을 그렸다. 르누아르는 친구와 달리 인물화에 중점을 뒀다. 그는 카페, 공원, 무도회장에서 마주하는 평범한 사람을 그렸다. 르누아르 그림 속 인물 표정은 행복한 꿈을 꾸는 인간의 얼굴처럼 평온하다. 그들 어깨엔 따스한 햇살이 떨어져 부서지는 중이다. 그의 작품엔 연인도 자주 등장한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이 사람들의 볼은 발그레하다. 포근하고 몽환적인 색채로 가득한 르누아르 그림은 계절로 따지면 봄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 주류 미술계는 원근법이나 명암법처럼 확고한 규칙조차 지키지 않는 이 젊은 예술가들을 반역자 취급했다. 하지만 세상은 결국 변했다. 이 반역자들은 어느새 혁명가가 됐고, 서양 회화 흐름을 바꿨다. 르누아르는 사랑에 빠진 연인, 천진난만한 아이, 떠들썩하게 청춘을 즐기는 젊은이들을 그렸다. 이 그림에는 눈물도 비극도 불행도 근심도 없다. 온화한 행복과 설렘뿐이다. 관객은 르누아르 작품 앞에서 사르르 무장해제됐다. 그래서 인상주의 화가 중에서도 가장 먼저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인물이 르누아르다.

잔 사마리의 초상(1877) / 푸슈킨미술관 소장
◆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르누아르는 왜 행복한 그림만 그렸을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림은 즐겁고 유쾌하고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르누아르의 신념이었다. 그는 그림 바깥에 얼마나 많은 비극이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화가였다. 가난하게 태어나서 이른 나이에 일을 해야 했던 삶이 어떻게 행복하기만 했겠는가. 그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비극 중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에도 참여했다. 그 지옥에서 소중한 친구까지 잃었다. 훗날 그의 아들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해 돌아오기도 했다. 말년에 르누아르는 지독한 관절염에 걸려 붓을 제대로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붕대로 붓을 감으면서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는 눈감기 직전까지 그림을 그렸다. 마지막에도 행복을 담은 그림을 그렸다.

르누아르는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하다"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아름다운 시간은 찰나다. 봄날은 분명히 지나가고 언젠간 겨울은 온다. 휴양지 햇살과 미풍도 영원히 누릴 수 없다. 아름다운 꽃도 언젠간 시든다. 누군가는 이 덧없음에 짓눌려 삶의 의미를 잃기도 한다. 하지만 르누아르는 반대로 생각했다. 그의 그림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어차피 언젠가 떠나야 할 삶이라면 굳이 이 삶을 어두운 색으로 채울 필요가 없다.'

적금처럼 행복의 순간을 차곡차곡 쌓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은 다르다. 인간은 힘들 때 반짝반짝 빛났던 순간의 추억을 꺼내먹으며 버틴다. 아름다운 기억이 많은 사람이 유리하다. 우리는 따스한 순간을 자주 누려야 한다.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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