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에서 온 늦깎이 대학생, 주류에 맞서는 모든 과학을 꿈꾸다

한겨레 2021. 8. 7.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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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여성이 대학 못 가던 고국 떠나
24살 학생으로 소르본대 입학
과학 연구분야 여성 장벽 깨고
남편과 연구 라듐·폴로늄 발견

[한겨레S]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
마리 퀴리

1920년의 마리 퀴리. 위키피디아

지난해 말에 본 영국 영화 <마리 퀴리>는 마리가 죽어가면서 남편인 피에르 퀴리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마리가 독서하며 걷다가 피에르와 부딪혀 놓친 책을 주워든 피에르가 책의 저자에 대해 말을 걸자 마리는 “주류적 태도에 맞서는 모든 과학에 흥미를 갖는다”고 답한다. 그 뒤에 이어지는 영화의 내용은 마리가 주류에 맞서 싸워 과학사의 최고가 되는 삶을 보여준다. 과학자가 비주류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상식이 아닐지 모르지만, 과학사를 보면 적어도 역사를 바꾼 위대한 과학자들에게는 그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전위의 이단이라는 점에서 과학은 예술과 같다. 과학자와 예술가는 우리 미래의 머리와 눈이다.

영화는 마리와 피에르의 사랑과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마리의 이단성을 충분히 알게 하지 못한다. 그의 이단성은 유대인 아버지에서 비롯된다. 러시아가 지배하는 폴란드에 살던 아버지는 수학과 물리 교사였으나 정치적 이유로 해고됐다. 어머니가 결핵으로 숨진 뒤 마리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서재에 틀어박혀 과학과 사회에 대한 독서와 토론을 거쳐 실증주의자로 자란다. 마리는 당시 폴란드의 민족해방투쟁을 지지한 아나키즘에도 관심이 컸다. 아나키스트와 실증주의자들은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관습에 저항했다. 노동야학에서 노동자를 가르치며 도서관도 만들어준 마리는 평생 사교나 오락, 옷차림이나 화장, 돈벌이나 출세와 같은 당시 부르주아 풍습과 무관하게 살았다.

“과학을 향한 꿈만이 온당하오”

여성이 대학교육을 받을 수 없는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로 가기 위해 마리는 시골에서 가정교사를 하는데 언니의 학비를 먼저 마련해준다. 6년간의 시골생활에서 모든 것을 혼자 책임지는 삶을 익힌 마리는 노동야학으로 돌아와 최초로 과학실험을 하지만, 불법시설이어서 항상 체포될 위험이 따랐다. 언니의 공부가 끝난 뒤 스물네살 늦깎이 학생으로 파리 소르본에 입학했다. 2~3년 만에 두 개의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실험공간 확보를 위해 자기학을 전공하는 실험교사 피에르를 친구한테서 소개받는다.

피에르는 파리코뮌에 참가한 아나키스트 의사의 아들로서 코뮌 부상자들을 돌보면서 자랐다. 학교를 비생산적인 강제시설로 여긴 아버지 때문에 피에르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독학으로 어렵게 소르본대학을 다녔다. 그러나 너무 가난하여 박사과정에는 들어가지 못해 실험교사로 일하던 서른여섯 나이의 노총각이었다. 여덟살 아래인 마리가 조국 폴란드에 돌아가 일하기 위해서 자기와의 결혼을 망설이자 피에르는 편지를 쓴다. “감히 말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꿈에 취해 한평생을 함께 보낼 수 있다면 그것은 믿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일이 될 겁니다. 조국을 향한 당신의 꿈, 인도주의를 위한 우리의 꿈, 그리고 과학을 위한 우리의 꿈. 저는 그중에서 오로지 마지막 꿈만이 현재로선 온당하다고 믿습니다.”

둘은 드레스도, 반지도, 성찬도 없이 오로지 자신들이 세계를 구원한다고 믿은 과학에 목숨을 바칠 동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결혼선물로 받은 돈으로 산 자전거로 신혼여행을 하며 나체로 수영하며 대화하는 모습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신혼부부 집에는 침대와 탁자 하나, 의자 둘, 그리고 책장뿐이었다. 곧 두 딸이 태어났지만, 피에르가 교사로 일한 공업학교의 작은 공간을 이용한 실험을 계속한다. 마리와 피에르는 방사성 원소를 분리하고 발견해서 이후 원자핵물리학이 발전할 길을 열어주었다. 이어 발견한 새로운 방사물질을 마리의 조국에 대한 경의로 폴로늄이라고 부르고 두번째로 발견한 방사물질을 라듐이라고 했다. 그 공로로 퀴리 부부는 190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 처음에는 피에르만 추천되었으나, 그는 마리와 공동 수상을 고집했다. 노벨상 수상 이후에야 두 사람은 프랑스에서 자리를 얻는다. 그 전에 마리는 외국인 여성이고, 피에르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반항적이라는 이유에서 아웃사이더로 살아야 했다. 피에르는 45살에 모교의 교수가 되지만, 2년 뒤에 교통사고로 죽는다. 두 사람이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경제적으로 이용했다면 숙원이었던 실험실을 더 일찍 가질 수도 있었으나, 그들은 과학을 돈으로 오염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모든 특허를 포기한다. 마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연금도 자선이라고 경멸하며 거부하다가 피에르 사후 교수직과 함께 받는다.그보다 24년 전 스톡홀름대학교의 교수가 된 러시아인 아나키스트 소피야 코발렙스카야 이후 유럽에서 두번째로 여성 교수가 된 것이었다. 마리는 제도교육에 반대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직접 가르치면서 아이들이 과학자들의 연구실을 방문하여 연구에 직접 참여해 배우게 했다.

1907년 이전 파리의 연구실에서 연구 중인 마리 퀴리(오른쪽)와 피에르 퀴리. 위키피디아

장녀 부부도 노벨화학상 수상

연구에 몰두한 마리는 오랜 동료인 기혼남 폴 랑주뱅을 사랑한다. 영화에서는 그 사랑을 육체적 관계뿐인 양 묘사하지만 여러 전기는 진실한 사랑이라고 본다. 엄청난 사회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1911년 두번째로 노벨상을 받고 연구소도 완성되지만 곧 1차 세계대전이 터진다. 지식은 만인을 위해 써야 한다고 믿은 마리는 노벨상 상패까지 내놓으며 병든 몸을 이끌고 전선에 뛰어들어 부상병들을 위해 방사선 촬영팀을 꾸린다. 운전병이 부족하여 스스로 운전도 배워 전선을 누비는 등 마리의 노력으로 100만명 이상이 검사와 치료를 받게 된다.

종전 이후 마리 퀴리는 건강이 더욱 나빠졌음에도 연구소 재정 확보를 위해 세계의 절반을 여행한다. 1922년 그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과 함께 국제연맹을 위해 일하면서 아나키스트인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에 대한 미국 법원의 사법살인에 반대하는 등의 사회운동에도 참가한다. 마리 퀴리는 1934년 방사능 과다 노출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장녀 이렌 졸리오퀴리 부부가 노벨화학상을 받고, 1965년에는 차녀 이브의 남편이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영화 중간중간에 첨가된 원자탄이나 원자핵의 문제는 마리가 경고한 대로 과학을 악용한 결과다.

전 영남대 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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