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의 미술소환] 오래된 논쟁

김지연 전시기획자·d/p 디렉터 2021. 8. 7.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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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모니카 본비치니, Hammering Out(an old argument), 1998 ⓒ Monica Bonvicini

한 사람이 흰 벽을 향해 망치질을 시작한다. 느리고 무겁게 반복되는 망치질에 벽이 떨어져 나가고, 누런 흙먼지가 우수수 내린다. 흰 벽의 껍데기 안쪽 석조 구조가 드러나면, 다시 벽은 애초의 하얀 상태로 돌아간다. 다시 망치질이 시작된다. 망치질이 되풀이되지만, 단단한 석벽을 뚫는 장면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석벽이 노출되면 다시 하얀 벽 앞으로 돌아가기를 수차례. 석조 구조 앞에 멈춰 서기를 반복하는 망치질은 한편 무기력해 보인다.

“나는 파괴 없는 건설은 없다고 말해왔다. 나는 예술가들이 단지 그들의 화려한 환상에서 무언가를 창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레닌이 말했듯, 목표는 현실보다 더 급진적이다. 시도하라!” 모니카 본비치니는 왜 유리나 벽을 망치로 깨뜨리는지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작가에게 유리와 벽은 권위의 이름으로 견고하게 서 있는 여러 가지 장애물 같은 존재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이를 깨뜨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창작과 파괴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권력의 구조를 들여다보는 작업을 해온 작가는, 건축이 설계하는 공간의 구조, 공간이 유도하는 감시와 통제의 메커니즘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작품 ‘해머링 아웃(오래된 논쟁)’에서 그는 건축 환경을 방해하고 개입하고 손상을 입히는 과정을 통해 망치질만으로는 무너져 내리지 않는 세계를 말한다. 투과할 수 없는 표피를 뒷받침하는 견고한 건축 석조는 작가에게 억압적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며, 건축을 이데올로기가 거주하는 담론의 장으로 바라보는 작가에게 건축을 해체하거나 파괴하는 일은, 이데올로기를 돌아보는 과정이다. 작가의 망치질은 결국, 중립적인 것처럼 깨끗하게 서 있는 하얀 벽면이 감춘 세계를 노출하기 위해 반복된다.

김지연 전시기획자·d/p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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