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의 묵언] 좋은 정치인은 갑자기 솟아날 수 없다
[경향신문]
1990년 새해 3당(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이 출범했다. 여소야대 정국을 일거에 뒤집었다. 299석 중 221석을 차지한 공룡정당은 무엇이든 삼켰다. 여야 합의로 통과된 지방자치법을 무력화시키며 지방선거를 연기하려 했다. 야당 총재 김대중은 평생의 바람인 지방자치제가 폐기될 위기에 처하자 단식투쟁을 벌였다. 여당 대표로 변신한 김영삼이 단식현장을 찾아왔다.
“비록 여당에 가담했지만 민주주의를 잊은 적이 없는 사람이오. 후광(김대중의 호), 나를 너무 욕하지 마시오.”
“이보시오, 거산(김영삼의 호). 우리가 민주화를 위해 싸웠는데, 민주화란 것이 무엇이오. 바로 의회정치와 지자제가 핵심 아닙니까. 지방자치는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기회를 놓칠 수도 있소. 다수 의석을 가지고 있다 해서 어찌 이를 외면하려 하시오.”
김영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양김(兩金)의 합의로 그렇게 지방자치시대가 열렸다. 지자제는 13일간의 단식투쟁으로 김대중이 쟁취했다. 하지만 여권에 김영삼이 있어서 가능했다. 김영삼은 정치인이 목숨을 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양김시대에 가장 의미 있는, 가장 아름다운 합의였다. 이로써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할 수 있었고, 나아가 수평적 정권교체가 가능해졌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김영삼과 김대중만이 직업정치인으로 출발해서 대권을 잡았다. 20대에 정계에 투신하여 1954년 나란히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둘은 정치의 외길을 걸었고 뼛속까지 정치인이었다. 변절하여 민주투사의 절개가 훼손되었지만 ‘호랑이굴로 들어가 호랑이를 잡은’ 김영삼의 결단이 없었다면 민주사회는 더디 왔을지도 모른다. 문민정부를 천명하며 군부독재의 잔재를 척결했던 쾌도난마의 순간들을 기억한다.
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정치인으로 성공할 수는 없다. 나쁜 정치는 민중의 삶을 피폐시키고 역사를 후퇴시킨다. 그래서 정치인은 시대정신과 균형감각을 지녀야 한다. 이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단히 민심을 살피고 현실을 직시해야 가능하다.
차를 오래 몰다보면 운전은 머리가 아닌 몸 전체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도 그럴 것이다. 노련한 정치인은 현안을 머리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가슴으로 느낀다. 정치인은 물음에 답을 하기 전에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그 배경을 살핀다. 답은 있으되 세상일에는 정답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최선을 찾되 최선에 이르기 어려우면 차선을 선택한다.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면 차악을 모색한다.
정치인 아닌 정치인들이 대선판을 흔들고 있다. 정치 초짜들의 행보가 가관이다. 왜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소양과 식견은 날것 그대로여서 비린내가 진동한다. 실언과 망언은 듣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이다. 이를 나무라면 정치를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으니 부족한 면은 차차 채워가겠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속성 과외로는 결코 시대정신과 균형감각을 체득할 수 없다. 정치는 여기(餘技)가 아니다. 국운을 좌우하는 숭고한 기술이다. 그리고 국민은 실험 대상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엄혹한 시절에 정치인 김영삼, 김대중은 이름만으로도 희망이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에게 양김은 ‘새로운 내일’이었다. 한 시대를 함께 건너갈 좋은 정치인이 존재함은 축복이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이 나쁜 정치를 해도 그것들을 바로잡는 일은 역시 정치를 통해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정치를 무조건 증오해서는 안 된다. 정치가 더럽다고, 정치인이 썩었다고 정치판에서 눈을 떼면 더 나쁜 정치인들이 활개를 친다. 좋은 지도자를 원한다면 부드러운 후원자, 매서운 감시자가 돼야 한다.
준비된 정치인은 어느 날 갑자기 솟아나지 않는다. 정치인은 수없이 민심의 검증을 받고 수없이 자기 검열을 하며 몸집을 불리고 맷집을 키워간다. 민심의 한복판에 서본 사람만이 민심이 무섭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요즘 민심을 제대로 판독할 수 있는 정치인은 누구인가. 여당은 이미 경선열차가 출발했으니 야권만을 들여다본다. 심상정, 안철수, 오세훈, 원희룡, 유승민…. 오래 봐서 식상할지 모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낯익어서 안심이 된다. 그들은 정치 초년생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식견과 품격을 지니고 있다. 자기 집에 금덩어리를 놔두고 밖으로 나돌며 구걸행각을 벌여서야 되겠는가.
김택근 시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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