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그늘] 데왁세기

김지연 사진가 2021. 8. 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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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기억의 목소리 연작. 2018. 고현주

눈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나 동백꽃은 애절함을 주지만 여름에 피어나는 꽃에서는 인내와 노고를 참는 무던함이 보인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맘껏 화사함을 드러내는 능소화나 한여름에 피어서 가을까지 들녘을 밝히는 배롱나무는 자칫 무기력해지기 쉬운 여름을 이기는 힘이 되어준다. 꽃인들 좋은 시절에 피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들이 있다.

사는 일이 힘들어지면 과거도 이웃도 잊고 지나가게 되는 것인가. 제주의 4·3과 여수항쟁, 광주 5·18이나 세월호를 이야기하려 하면 ‘이제 지나간 이야기’는 그만하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고현주 사진가는 4·3학살로 인해 스러져간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작업으로 그 유족들이 지녀온 유품들을 찾아 영혼을 붙이는 작업을 해왔다. 떨어진 붉은 동백꽃 위에 놓인 핏빛 저고리와 구릿빛 수저, 벚꽃나무 사이에서 펄럭이는 옥색 두루마기. 작가는 스스로도 아프고 유족도 아프고, 보는 우리도 아픈 현실을 끌어안은 채 세상에 호소하고 있다.

4·3사건 때 홍기성씨는 죽창에 찔려 많은 피를 흘린 나머지 빈혈로 고생하다가 간신히 세탁소 일을 찾아서 살아왔다. 그는 어머니가 남기고 간 데왁세기(나무 쪽박)를 의지 삼고 살았다.

어머니는 “쌀독에 쌀이 그득할 때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담는데 독에 쌀이 비어갈수록 허리를 깊이 숙여야 하는 것이 서럽다”고 하셨다며, 죄 없이 허리를 숙이고 살아야 했던 피해자들의 설움을 전해주고 있다.

김지연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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