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청년을 괴물로 만들면 그만일까

한겨레 2021. 8. 4.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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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조문영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양궁 국가대표 안산 선수가 도쿄올림픽 3관왕을 차지했다. 페미니즘을 ‘페미’란 낙인으로 둔갑시킨 (대부분 청년 남성) 네티즌들이 그의 외모와 표현을 문제 삼아 혐오 사냥을 벌이던 차에 달성한 위업이다. “여러분들은 국가, 인종, 종교, 성별로 규정된 게 아닌 자신의 꿈을 향해 묵묵히 노력한 한 인간으로서의 선수 그 자체를 보고 계신다”라는 방송 아나운서 멘트에 찬사가 쏟아졌다.

감격스러운 한편 민족주의의 위력이 새삼 놀랍다. 기업이나 공공기관이 온라인에서 확산 중인 페미니즘 공격에 대해 자기방어에만 급급했던 게 최근의 일이다. 쇼트커트에서 혐오의 구실을 찾는 꼴불견이 국제무대에서 재연되니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온라인 학대”를 대서특필한 외신 보도가, 유튜브에서 해외 언론 반응을 확인하고 ‘인증’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에게 국가 망신으로 여겨졌을 테다. 민족이란 역린을 건드린 남초 커뮤니티는 (아나운서에서 중년 배우까지) 같은 남성들한테도 맹공격을 받는 중이다. 올림픽이 아니었다면 역사의 장면은 꽤 달랐을 것 같다.

그런데 ‘페미’ 공격에 혈안이 된 젊은 남성들을 괴물, 철부지, 가해자로 비난하면 그만일까? 빈곤과 불평등, 실존적 불안정성에 결박당한 사람들이 특정한 형상으로 고착화된 사례는 부지기수다. 글로벌 아웃소싱과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잔혹사를 덮어둔 채, 미국 중서부의 백인 저소득층을 “백인 쓰레기”(white trash)로, 영국의 노동계급을 폭력적이고 복지예산이나 축내는 “차브”(chav)로 호명한 공론장은 절망과 분노만 키웠다. 이들이 트럼프 지지 시위나 브렉시트에서 보여준 인종적 편견과 이주자 혐오가 기존의 오명을 증폭시켰다. 멀리 갈 필요 없이 한국의 젊은 남성을 보라. ‘일베’에 대한 조롱과 ‘청년 고독사’에 대한 안타까움 사이에서 널뛰기하는 대신, 취약한 삶들의 공격성, 공격적인 삶들의 취약함을 직시할 순 없을까.

논쟁적인 책 <k를 생각한다="">에서, 젊은 저자 임명묵은 90년대생의 불안과 불만을 두 가지 맥락에서 분석한다. 하나는 세계경제와 연결되어 급성장한 고부가가치 제조업·서비스업과 여전히 저임금 체계가 작동하는 저부가가치 산업이 분리된 한국의 이중 경제체제다. 양자의 격차가 계속 벌어지고, 심지어 지위의 세습 경향이 농후해졌다는 점이 청년들의 무기력감을 키웠다. 둘째는 스마트폰 시대의 미디어 환경이다. 자신에게 유일한 소속감을 제공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지위 경쟁은 때로 투쟁성, 폭력성을 조장하고, “사용자들에게 상시적으로 감시망을 작동시켜야 하는 전장(戰場)”이 되기 일쑤다. 정치경제와 기술이 서로 불쏘시개가 되면서 타오른 불안과 불만이 여성·소수자·이주자·난민에 대한 혐오로, 취약한 삶들끼리의 적대로 번지고 있다.

남초 커뮤니티의 여론몰이가 위험하지만, 책임은 집단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책에서 동의할 수 없는 바가 많고, 국수 가락을 매끄럽게 뽑은 듯한 문체가 전장에서 90년대생 엘리트 저자의 위치를 되묻게 하지만, 그가 ‘헬조선’의 연루자 중 하나로 586을 지목하는 대목에 일면 수긍이 갔다. 사회학자 이철승이 <불평등의 세대>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이른바 86세대는 민주화운동뿐 아니라 계급 재생산에도 헌신했다. 자녀 입시에 영민한 마르크스주의자, 부동산에 해박한 여성학자 등 이따금 마주한 일부 86세대 지식인이 내게는 가십거리 정도였지만, 저자를 포함한 90년대생에게는 분노 유발자였다. “나는 상위 1% 기득권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을 동경하고 모방했던,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계층 세습에서는 어떻게든 도덕적 면죄부를 주려는 상위 10%, 20%의 감수성에 질겁했다”(⟨k를 생각한다⟩ 중).

비판적 지식인이 저 자신을 난장(亂場) 바깥에 위치시키고, 세상만사에 구조의 문제 운운하다 취약한 삶들의 폭력성과 대면하는 순간 등 돌리는 꼼수를 용인할 공간은 학계 외에 남지 않은 것 같다. 특정 집단을 괴물로 만들거나 정치 자원화하는 식으로 현재의 야단법석을 마름질하는 대신, 모두가 어떻게 연루되었는지 날카롭게 분석하고 구체적인 해법을 숙의할 때가 왔다. 특히 코로나 이후 악화일로에 있는 불평등이 시한폭탄이다. 분배를 생산의 아류가 아니라 21세기 생존과 안전, 공생의 핵심 화두로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제도화해야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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