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도 쉰 것 같지 않을 때 '살아보러' 가는 거야

이명희 선임기자 2021. 8. 4.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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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유휴 하우스’는 노마드 라이프나 리모트 워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공유주거 서비스를 제공한다. 경남 남해군 1·2호점 입주자들이 가전제품이 구비된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고, 거실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며 휴식을 즐기거나 집 근처 바닷가에서 책을 읽으며(왼쪽 사진부터)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블랭크 제공
경남 남해 공유주택 ‘유휴 하우스’
비대면 근무 시스템 가능하다면
업무와 휴식 함께하는 ‘한 달 살기’
거실로 출근, 바다와 숲으로 퇴근

부산에서 관광 플랫폼 사업을 하고 있는 이형민 헤르마이 대표(30)는 최근 남해에 집을 얻어 두 달을 지냈다. 콘텐츠 개발을 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출장을 자주 다녀야 하는데 코로나19 사태로 장거리 이동이 여의치 않다 보니 아예 일터를 옮긴 것이다.

이 대표가 직원 3명과 함께 머물렀던 곳은 경남 남해군 상주면의 공유주택 ‘유휴 하우스’다. 평소와 같은 일을 하면서도 다른 것이 있다면, 해질 무렵의 바다를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행을 온 것처럼 지역 맛집도 찾아다녔다.

이 대표는 지난 2일 기자와 통화하면서 “남해에서 일하는 동안 자연환경이 워낙 좋아서인지 일이 주는 스트레스도 덜했다”며 “일하다가 창밖을 바라보기만 해도 시야가 확 트여 있어 왠지 마음이 차분해지고, 동네에서 간간이 들리는 소리도 도시 소음과는 달리 정겨웠다”고 말했다.

“코로나 탓도 있지만 출장을 가면 지낼 곳이 마땅치 않다. 숙박만이 아니라 사무실처럼 일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는데 마침 유휴 하우스의 콘셉트가 딱 맞았다. 지내는 동안 업무 공간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이 분리돼 있는 점이 특히 좋았다.”

이 대표는 코로나19로 공유주택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다른 입주자들과 교류하지 못한 점을 아쉬운 대목으로 꼽았다. 그는 “아무래도 모이기가 조심스러워 입주자들끼리 공용 냉장고에 나눠 먹을 음식을 넣어놓고 ‘맛있게 드세요’라는 쪽지를 붙여놓는 정도로만 소통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주민들과 어울리며 동네에 녹아들다 보니 일하기는 수월했다. 이 대표는 “며칠 머물다 가는 게 아니라 24시간 동네에서 생활하다 보니 자연스레 마을 주민들과도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됐다”면서 “지역 정서를 알게 되니까 관광 콘텐츠 개발 등 하고 있는 일에도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만난 수제맥주 공방 운영자와는 협업 계획도 세웠다.

“그 사장님이 홈 브루잉 클래스를 열고 있는데 젊은이들의 니즈나 트렌드를 파악하지 못해 어려워하셨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 서로 의견을 주고받다가 우리가 콘텐츠 기획을 하고 협업을 하기로 했다.”

이 대표는 ‘한달살기’ 등 장기 체류 여행을 결심했다면, 가고자 하는 지역의 인프라를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편의점, 마트, 병원 등 인프라가 어느 정도 갖춰진 지역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며 “도시를 떠나 조용한 곳에 살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너무 외진 곳을 고르면 생활하는 데 어려움도 많고 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을 받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이 대표 일행이 살았던 유휴 하우스는 소셜벤처 ‘블랭크’에서 빈집을 직접 개조한 공유주택이다. 지역의 빈집 큐레이션 ‘유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블랭크는 지난해 상주면 임촌마을에 1·2호점을, 최근 제주 함덕해수욕장에 3호점을 열었다. 올 하반기 여수, 부여 지점을 오픈할 예정이다.

유휴 하우스의 커뮤니티 매니저 김경환씨(27)는 “건축을 전공했는데 지방소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유휴 하우스는 기획 단계부터 참여했는데 집을 구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에 빈집은 많은데 막상 매물로는 안 나온다”면서 “마을 어르신들이 ‘나중에 자식들이 와서 살지 모른다’며 집을 팔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장님도 찾아가고, 발품을 팔아 겨우 집을 찾았다”고 했다.

유휴 프로젝트는 단순히 집을 빌려주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는 지역 허브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들이 유휴 하우스를 남해에서 제일 먼저 시작한 것도 자연환경과 인적 인프라 때문이다.

“우선 남해의 자연이 너무 아름답다. 또한 청년들의 ‘촌라이프’를 지원하는 ‘팜프라’, 문화 콘텐츠를 기획·운영하는 ‘돌창고 프로젝트’ 등 다양한 분야의 크리에이터들이 커뮤니티 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런 인적 인프라가 갖춰진 곳에 유휴 하우스를 열면 이들과 협업도 할 수 있고 지역 거점 역할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 주민들이 타지에서 온 사람들을 배척하지 않으신다.”

김씨는 “도시는 미세먼지도 많고, 가까운 곳에서 여가를 즐기는 게 사실 힘들지 않냐”면서 “카약이나 요트 등 레저를 즐기거나 일 끝나고 해변으로 산책 가는 일상이 여기선 가능하다”고 말했다.

당초 유휴 하우스는 멤버십 기반으로 방은 따로 쓰고 부엌과 거실 등은 나눠 쓰는 공유주택으로 설계됐다. 매월 구독료를 내고 원하는 지역의 유휴 하우스를 이용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현재는 코로나19 사태로 단기 및 장기로 집을 통째 빌려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1호점은 방 3개와 거실, 주방, 화장실로 이루어진 주택으로 입주비는 1일 기준 15만원이다. 2호점은 방 2개와 거실, 주방이 있는 본채, 방 1개와 작은 주방이 딸린 별채가 있다. 하루에 20만원이다. 지난달 제주에 문을 연 3호점은 방 4개가 있는 주택으로 하루 25만원이다. 모두 관리비가 포함된 가격이다. 최소 일주일 이상 예약을 받고, 장기 계약을 하면 할인 혜택이 있다. 1주는 10%, 2주 30%, 3주 45%, 4주 55% 할인이 적용된다. 기본적인 식기와 냉장고,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등 가전이 구비돼 있다. 입주 절차는 홈페이지에서 입주 신청 후 부동산 단기 전대차 계약서를 작성하면 마무리된다. 1~3호점 모두 8월은 예약이 마감됐고, 9월부터 예약이 가능하다.

김씨는 “동네에 민박업을 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유휴 하우스에 사람들이 와서 머무는 것을 신기해하면서도 궁금해한다”며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면 멤버십 기반의 주거 구독 서비스를 다시 시도하려고 한다. 지역에 이런 공간들이 많이 생기면 지역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빈집을 리모델링한 경남 남해군 상주면 공유주택 ‘유휴 하우스’ 2호점(왼쪽 사진)과 제주 함덕해수욕장에 있는 3호점 침실. 블랭크 제공
강원 홍천 ‘반년살기’ 프로젝트 등
지자체들, 자체 프로그램 운영 중
최소 1주~반년 체류비용 지원도
휴가로는 알 수 없는 ‘생활 경험’

전국 각지엔 요즘 체류형 여행을 하는 이들이 늘었다. 덩달아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체류형 프로그램도 인기가 높다. 현재 강원도를 비롯해 경남, 전남 등 여러 지자체에서 지역 활성화와 귀농·귀촌 인구 유입을 위해 장기 체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최소 일주일부터 한 달이나 반년까지 숙박비와 식비 등 체류비용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경쟁이 치열하지만 비용 부담 없이 집을 떠나 타지에서 살아보고 싶다면 지자체의 프로그램을 노려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인천에서 대학교수로 재직 중인 이상호씨(65)도 지난 4월부터 ‘인천반·홍천반’ 생활을 시작했다. 강원 홍천군 서석면 삼생마을의 ‘반년살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퇴직을 앞둔 이씨는 오랫동안 꿈꿨던 귀촌을 실행하기에 앞서 ‘강원도 반년살기’ 프로젝트에 신청해 10 대 1의 경쟁을 뚫고 선정됐다.

이씨는 “주중에는 마을에 있다가 주말에는 집이 있는 인천으로 가서 생활한다”면서 “아내는 직장 때문에 오지 못해 혼자 와 있지만 퇴직 후에는 귀촌해 농원을 운영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곳에 와서 뜻밖에 내가 육체노동에 맞는 체질이라는 걸 발견했다”면서 “다른 참가자들은 힘들다고 하는데 농사일이 별로 안 힘들다”고 말했다.

이씨는 코로나19 이전까지만 해도 해외에 있는 산으로 등반을 자주 다녔다고 한다. 그는 “시간 날 때마다 등산을 다니다가 요샌 가지 못해 답답했는데 이곳에 있으니 공기도 좋고, 마음이 순수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지자체들이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주로 귀촌·귀농에만 맞춰져 있어 콘텐츠가 다양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씨는 “농촌에서 살아보려고 마음먹어도 집을 구하기가 힘들다. 임대로 나오는 집이 없기 때문에 집을 사야 가능한데 현실적으로 집을 당장 사서 지역으로 오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면서 “귀촌 목적이 아니더라도 중·장기로 살아보며 체험할 수 있는 로컬 프로그램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청년들에게도 팍팍한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살아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일자리도 생기는 등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낯선 곳에서 몇 개월간 머무르며 짧은 여행으로는 알 수 없었던 현지인들의 생활을 경험하는 것은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본 일이다. 수년 전에도 ‘제주 한달살기’ 열풍이 분 적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과거 관광 위주의 형태에서 벗어나 낯선 지역에서 ‘살기’라는 여행 방법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해외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데다 원격 근무·교육 등 비대면 시스템이 가능해지자 지방 소도시로 거주지를 옮겨 업무와 휴식을 함께하는 방식이 여행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발표한 ‘2021 국내 관광 트렌드’를 보면 ‘한달살기’ 등 새로운 형태의 여행에 대한 언급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회원 수 7만7000여명에 달하는 온라인 카페 ‘일년에 한 도시 한달살기’에는 연일 한달살기를 희망하는 이들의 방문이 이어진다. 준비 과정부터 숙소, 후기 공유가 활발하다.

유휴 하우스를 운영하는 블랭크의 문승규 대표(35)는 “팬데믹으로 인한 변화 중 하나는 사람들이 여행에 대해 관광이 아닌 어느 지역에서 거주하며 새로운 일상을 만드는 경험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이라며 “앞으로 한 달이나 그 이상 숙박할 수 있는 공간이 더 많이 필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고 했던가. ‘집콕’ 생활에 지친 요즘, 거실로 출근해 바다, 숲으로 퇴근하는 일은 상상만 해도 근사하다.

이명희 선임기자 mins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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