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100년전 여름 폭염 속 '고생살이' 직업

2021. 8. 4.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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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염천대낮에 '아이스크림 장사' 처량한 신세 한탄 삼복 불덩이 다루는 '대장장이' 변변한 옷도 없어 '배달부' 불볕에 뛰어다니지만 월급은 고작 몇십원 겉옷까지 땀 흥건 '교통순사' 한때도 편한 틈 없어

잠깐 밖에 나가는 것도 무서울 정도의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어딜 가나 '더위' 얘기다. 직업상 어쩔 수 없이 폭염과 싸워가면서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 100년 전에도 별로 다를 바 없었다. 폭염 속에서 '분투의 삶'을 살았던 분들을 만나러 100년 전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1921년 7월 21일자 매일신보에 '서중(暑中; 여름 더운 때)의 고생살이 직업, 나는 아이스크림 장사올시다'란 기사가 보인다.

"다른 장사보다 조금 더 이(利)가 남는 무던한 장사지만, 한창 찌는 듯한 염천(炎天) 대낮에 어깨가 휠 듯한 물통 지게 같은 것을 둘러메고 장충단공원 같은 데에 가면, 어떤 손님은 고작 1전짜리를 먹고, 또 어떤 손님은 업신여기기를 자기 집 종놈 종년만도 못하게 여깁니다. 이 기생 저 기생집으로 기웃기웃하며 안 나오는 비렁뱅이 소리로 굽실굽실하며 "더우신데 잡수시면 참으로 시원합니다" 하면, 주인아씨 덕으로 몇 개 팔아 가지고 집에 돌아와 쌀 한 되, 나무까지 장만하여 놓고 보면, 이 놈의 신세 딴에는 참 처량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쪼록 동정하시오. 세상만사가 모두 생각을 하면 무비(無非; 모두) 일장춘몽(一場春夢)이요, 또한 뜬구름 같은 이 세상 사람의 살림살이올시다."

이어 7월 22일자에는 '서중(暑中)의 고생살이 직업, 이 사람은 대장장이올시다'라는 기사가 실려있다. '불'과 씨름하는 대장장이다.

"삼복(三伏) 염천에 불덩이하고 노는 사람은 아마 우리 대장장이 밖에 없을 것이올시다. 세상에 팔자를 그릇타고 나서 내 팔자는 기구하기 짝이 없어서 밤낮으로 땀에 젖은 고약덩이 같은 더러운 옷을 몸에 걸치고 한창 달궈진 꽃불 같은 쇳덩이를 연장 든 좌우 네 사람이 발을 맞추어 가며 두들기며 하루 공전 2원을 날마다 받아다가 부모, 처자, 동생 권솔(眷率; 식구)을 먹여가노라니, 어느 겨를에 내 몸 하나를 볼 수가 없어서 제법 출입할 옷이라고 한 가지도 없습니다. 지난 구주대전(歐洲大戰;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쇠라는 것이 귀해 그때는 우리 생활에도 여유가 생기는 동시에 안정이라는 것이 생겨서 먹고 입고 쓰고 겨우 숨을 돌렸으나 근래 와서는 물가가 떨어졌다는 핑계로 공전을 내리 깍고 뻔들뻔들 노는 대장장이가 참 많기도 많습니다."

이어 7월 25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된 '서중(書中)의 고생살이 직업, 이 사람은 배달부올시다'라는 제목의 기사다. 배달부 역시 고역이다.

"밤이나 낮이나 문을 두드리며 여보! 전보가 들어가오, 여보! 편지요하며 한 시도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우편전신 배달부올시다. 이 놈의 팔자는 기구하기가 한량없어서 항상 춘하추동 사시절에 헌 누더기 깁고 기운 옷을 걸치고, 경성 시중을 두루 방문하며 모든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기별을 전하며 월급이라고 몇 푼 안 되는 몇 십 원에 목이 매어 불같은 볕을 쪼여가며 한창 뛰어다닐 적에는, 땀내는 옆 사람도 코를 내두를 만하게 되고 숨은 턱에 닿고, 여름 삼복 중에 제일 나의 직업이 세상사람의 무한한 동정을 받을만한 것이올시다. 덥기도 한량없고 여러 말 하지 않아도 다 아실 터이나, 우체통 찾으러 다니며 편지 수집하는 이 놈의 복중(伏中) 생활은 내가 생각해도 가엾습니다."

밖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만 힘든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가게, 즉 실내에서 일하는 사람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7월 26일자 매일신보의 '서중(暑中)의 고생살이 직업, 나는 이발업자올시다'를 읽어보자. 기사에는 이발사들의 애환이 잘 드러난다.

"다리에서 쥐가 오르도록 가위와 빗을 들고 남의 땀내 나는 머리를 깎아주고, 30,40전이나 혹은 40,50전에 목을 매고 지내는 우리 이발업자의 이야기도 좀 들어보십시오. 물론 우리보다 더 불쌍하고 어려운 노동을 하는 사람도 많기는 하겠지요마는, 우리가 하는 노동같이 기막히고 정신 드는 노동도 흔치 못할 줄로 압니다. 자고 깨면 가위 한 개와 빗 한 개만 가지고 아침부터 밤들기까지 혹시 손님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혹은 손님의 얼굴에 칼자국 한 개라도 나게 될까, 눈동자 하나 깜짝거리지 못하고 일을 할 때에, 손님 10명 중에 7,8명은 머리 깎는 동안 맛있는 잠을 자고 있습니다. (중략) 더구나 요즘엔 중국인 이발업자가 10전을 덜 받고 깎는다고 청국(淸國) 더러운 땀내와 노린내 나는 그곳에 10전을 덜 쓰자고 고개를 들이 밀고 들어가서, 본전통(현 충무로 일대)에는 청국인 이발업자의 세력이 확장된 뒤에 벌써 광교 북편을 향하고 차차로 들어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십니까? 청국 사람들에게 10전짜리 조선사람이 되는 것을 생각하면 그만 눈물이 나며 한숨을 금치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7월 30일자 매일신보에 '서중(暑中)의 고생살이 직업, 나는 교통순사올시다'라는 제목의 교통순경 이야기가 실려있다. " 봉급 생활을 해가며 때로는 사람의 욕을 먹고 지내는 참 진저리 나는 순사올시다. 월급 30여 원에 목이 매어 더운 줄 모르고 아주 죽을 지경으로 서 있을 때에는 땀이 철철 흘러 속내복에서 겉복장까지 땀에 흠씬 배이며 응달 하나 없이 가만히 섰을 때는, 그 자리에서 그만 복장을 벗어 버리고 나갈 마음이 굴뚝같지만은 목구멍 하나로 해서 세상 사람이 모두 고생을 하며 죽고 사는 터인데, 이나마 내놓으면 그날부터 밥줄이 끊어져서 부모, 처자 권솔들을 먹여 살릴 도리가 없습니다.조금 잘못하면 시말서를 쓰던가, 상관의 호령에 한시 한때도 편한 틈이 없고 보니, 교통순사 같이 가엾은 것은 없습니다."

세상 사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 있을까마는, 이런 분들 덕분에 우리가 편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저 "고맙다" "수고한다"는 말 한 마디가 이 분들에게는 에어컨 바람보다 더 시원한 바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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