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원한 의사" 코로나19 철벽 방역 이끈 로테이 체링 부탄 총리 [시스루 피플]

박은하 기자 입력 2021. 8. 4. 15:11 수정 2021. 8. 27.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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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로테이 체링 부탄 총리가 지난해 6월 영국이 주최한 글로벌 백신 정상회의(Global Vaccine Summit)에 원격으로 참여해 공평한 백신분배와 개발도상국 지원을 주장하고 있다. /세계백신면역협회

“외과 의사들은 메스를 들고 환자를 수술하고 나는 정치인으로서 펜을 들고 나라를 수술한다. 하지만 정치는 내 삶에서 지나가는 과업이다. 나는 정치인이기 전에 먼저 그리고 영원히 외과의사이다.”

로테이 체링 부탄 총리(52)는 매주 토요일이면 흰 가운을 입고 환자 앞에 선다. 정치인이 된 후에도 늘 그래왔다. “다른 사람들이 주말에 골프를 치거나 활을 쏘는 것처럼 나는 수술을 한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한 적도 있다. “나는 영원한 외과의사”라는 말은 지난해 12월 인도외과의사협회 컨퍼런스에서 했다. 그는 민주화 이후 부탄의 세번째 총리이다.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코로나19 대응을 잘 하는 국가 지도자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한때 부탄에서 유일한 숙련된 비뇨기과 전문의였다. 팀부현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방글라데시 다카 의대와 미국 위스콘신 대학을 거쳐 비뇨기과 전문의가 됐다. 싱가포르와 일본에서도 근무 경험이 있다. 부탄 주요 공립병원을 거쳐 선대 국왕의 이름을 딴 ‘지그메 도르지 왕축 국립위탁병원’에서 정계입문 전까지 11년간 근무했다. 2013년 신생 부탄연합당(DNT)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당은 원내진출에 실패했다. 부탄에서는 상위 1, 2위 정당만 원내정당이 된다.

체링 총리는 2018년 5월 당대표가 되고 그해 11월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가 됐다. 부탄연합당이 당시 집권 국민민주당(PDP)과 현 제1야당인 평화번영당(DPT)을 꺾은 것은 나라 안팎에서 이변으로 받아들여졌다. 연간 8% 성장을 이룬 여당과 수력발전소를 더 지어 전력 수출을 늘리자는 평화번영당에 맞선 부탄연합당의 핵심 공약은 의료정책 개선이었다. 부탄에서 모든 병원은 국공립이며 의료는 외국인에게까지 무상으로 제공된다. 하지만 의료인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18년 기준 부탄의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0.4명이다. 아프가니스탄(0.3명)보다 많고, 미얀마(0.6명)보다 적다. 의사와 간호사 상당 수가 전통의학으로 훈련받았다. 전국 곳곳에 보건소격인 기본건강시설이 있지만 현대적 병원은 도시에만 있다.

인구 78만명(성인 53만명)의 작은 나라이긴 하지만 열악한 의료 여건에서도 코로나19 국면에서 부탄의 성과는 도드라진다. 국제 통계사이트 월드오미터에 따르면 지난 1일 기준 부탄의 누적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2532명, 누적 사망자는 2명이다. 부탄이 중국과 인도의 접경에 있고, 델타 변이 발원지인 인도와 특히 가깝게 지내는 걸 감안하면 철벽방어를 해낸 셈이다. 지난달에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성인 대상 백신 접종을 완료를 선언했다.

부탄 정부는 지난해 1월 11일부터 국가적 감염병 대응계획을 세웠다. 2019년 12월31일 중국에서 발생한 원인 불명의 폐렴 사례가 세계보건기구(WHO)에 보고된지 열흘여 만이다. 지난해 3월6일 부탄 내 미국인 관광객 1명이 확진되자 3주 동안 전면봉쇄에 들어갔다. 전국의 기본건강시설과 검진 어플리케이션을 활용해 전국민 추적조사를 실시했다. 귀국한 유학생과 이주노동자 수천여명도 국경에서 안전하게 머물도록 했다. 저소득층 가정에는 식료품과 상비약 등을 전달했다. 봉쇄기간 체링 총리도 집무실에서 먹고 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들 사이 방역에 협조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의료 자원봉사와 기부도 이어졌다.

백신 접종으로 선진국에서 코로나 종식의 희망이 부풀던 지난 5월 체링 총리는 대국민연설에서 “지금 바이러스의 고삐를 조이지 않으면 전멸한다”고 말했다. 부탄은 4월부터 인도로부터 백신 55만명분을 들여와 접종을 시작했다. 인도가 자국 코로나19 확산을 이유로 백신 기증을 중단하자 유엔(UN)과 WHO가 참여하는 백신분배 프로그램인 코백스(COVAX) 프로젝트와 덴마크,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등을 통해 백신 95만명분을 추가 확보했다. 오지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의료진을 보내 백신을 맞혔다. 페이스북 정부 계정에서도 국민들의 백신 관련 문의에 총리가 직접 답했다. 왕실도 전국을 돌며 백신접종을 장려했다. 2차 접종 시작 일주일 만에 성인 90%가 접종으로 응답했다.

행복을 우선하는 국가 기조가 감염병 유행 국면에서 힘을 발휘했다. 열악하나마 전 국민을 상대로 보건서비스를 제공하는 인프라를 이미 갖춰 예방 위주 정책과 신속한 접종도 가능했다. 관광이 주력 산업이지만 단호하게 봉쇄를 결정했다. 의사 출신 총리가 정책의 전문성을 더했다. 탄디 도르지 외교부 장관, 데첸 왕모 보건부 장관도 의사 출신이다. 소국인 데다 동일성을 추구하는 사회라는 점도 방역에는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부탄에서는 전통복장을 공무원 제복으로 채택했으며 사회갈등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 원내정당도 두 곳으로 제한한다. 왕실과 불교, 전통문화를 중심으로 통합을 강조한다.

부탄 출신 언론인 남가이 잠은 “나는 소규모 공동체의 폐쇄성이 개인을 얼마나 질식시킬 수 있는지 비판해왔지만, 이번 감염병 국면에서 부탄의 성공은 민중과 지도자들이 서로 믿고 하나의 공동체라고 생각하는 끈끈함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공공보건학자이자 작가인 매들린 드렉슬러는 미국 시사잡지 디 아틀란틱 칼럼에서 “부탄의 코로나19 정책은 기술 관료주의적 접근과는 달랐다”며 “이번 경험은 부탄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위기가 지나가고 난 뒤 전진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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