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100년 전 광주천은 사행천..반대편에 드넓은 백사장 형성"

설경완 입력 2021. 8. 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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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광주천은 광주 농민을 먹여 살린 생명수이자 최고 피서지
- 광주천 작은 장터에서 1919년 광주 만세 시위 처음 시작
- 광주천 명칭 1916년 등장..이전엔 건천, 금계, 조탄, 서천으로 불려
[KBS 광주]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8월 10일(화)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설경완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 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박나영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XOFFXjCofeI

매주 수요일은 남도 역사에 대해서 들어보는 시간이 마련돼 있죠..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코너인데요.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저희 방송은 유튜브에서도 실시간으로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 설경완 기자 (이하 설경완):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코너입니다.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이 함께하셨습니다. 안녕하세요?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설경완: 오늘 준비해주신 역사 이야기 주제는 무엇입니까?

◆ 노성태: 광주가 150만 명 살지요? 광주는 150만이 사는 광역시가 됐고 그리고 그 광역시로 흐르는 핵심 강이 지금은 영산강, 황룡강, 극랑강이라고 불리는 영산강인데요. 100여년 전만 하더라도 광주 인구가 1만 명 정도밖에 안 됐습니다. 그때 당시 광주를 관통했던 강은, 그때 천이라고 불러서 광주천이었는데요. 오늘은 광주천이 품고 있는 역사 그리고 광주천이 어떤 이름으로 불렸는지 이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설경완: 말씀하신 대로 100여년 전에는 광주천이 그만큼 광주 시민의 삶에 중요한 터전이었다 이렇게도 읽히는데 당시 광주인들에게 광주천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 노성태: 지금은 놀이공간이 너무 많습니다만 그때 광주천은 아이들에게는 신나는 놀이공간이었습니다. 계절을 바꿔가면서 멱을 감고 낚시하고 고기 잡고. 그리고 겨울에는 썰매타는 장소였고요. 그리고 광주천에 그때는 사행천이었거든요. 그래서 물길이 흘렀던 반대편에는 드넓은 백사장이 이렇게 형성됐는데 여기에서 공을 차고 놀던 운동장이었고요. 그리고 대부분이 인구 1만 명이었으니까 광주 사람들이 농사를 지었던 시절에 광주천의 물줄기가 경양방죽으로 흘러들어가서 광주 농민을 먹여 살렸던 생명수였고 그리고 선풍기도 없었던 그 시절에 강변 거대한 버드나무숲은 여름 더위를 식히는 광주의 최고 피서지이기도 했던 것이지요.

◇ 설경완: 현재 광주천의 모습을 기준으로 해서 100여년 전에 백사장이 있었다. 상상이 안 가는 것 같습니다.

◆ 노성태: 아마 20년대 후반에 직선화 됐기 때문에 나이 많이 드신 할아버지가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다.

◇ 설경완: 아마 말씀을 들어보면 광주천 아낙네들의 빨래터도 있었을 것 같아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어머님들이 봄이 되면 겨우내 밀렸던 빨래를 했던 장소였고요. 또 봄이 되면 강둑에서 나물을 캐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주천은 축제의 장소였는데요. 정월대보름 광주 시민이 줄다리기를 벌였고 또 추석에 남사당패들이 놀이판을 벌였던 현장이기도 하고요. 해방 후에는 저도 봤습니다만 약장수들이 들어와서 약을 팔기 전에 가설무대를 차려서 나이롱극장이라고 문을 열잖아요. 그 현장이 광주천이기도 했는데 최근에 광주천에서 보니까 연등축제 이렇게 벌이더라고요.

◇ 설경완: 최근에 광주천을 되살리기 위해서 광주시나 환경단체가 많이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말씀을 들어보면 가설무대가 들어설 정도였으면 장도 서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지금 계속 이야기 드리지만 20년대 중후반 이전까지는 사행천이었다고 구불구불한 강이었다. 그래서 물길이 흐르는 반대편에는 모래사장이 형성되어 있고 모래사장은 각종 문화의 놀이 장소이기도 했지만 또 장이 서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태평극장을 아시는 분이 꽤 있을 것 같아요.

◇ 설경완: 저도 거기는 압니다.

◆ 노성태: 네. 그래서 그 앞이 지금 부동교라고 하는 다리가 있는데 그 밑에 있는 5일, 10일에 장이 서는 작은 장터였고요. 그리고 광주 공원 앞에 현대극장이라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는 3일과 8일에 큰장이 서는 장터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20년대 후반 계속 말씀을 드립니다만 직선화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32년도에 사동 매립지에 두 장을 합쳐서 장이 개설됩니다. 이것이 사정시장이라고 불렀던 시장인데 그런데 1940년도에 광주 공원이 옛날 일제시대 때 신사가 있었던 장소거든요. 신사의 걱이 국패신사라고 국가가 운영하는 신사로 높이게 되니까 그 옆에 시장이 시끄럽잖아요. 그래서 양동시장으로 옮기게 됩니다. 1940년도 이야기지요.

◇ 설경완: 원장님 말씀 중에 제가 잠깐 의문이 드는 것이 하나가 인구 통계를 바로 확인하기는 어려운데 100여년 전 인구가 1만 명 안팎이었다. 너무 적은 것 아닌가 싶습니다.

◆ 노성태: 그때 광주면이었어요. 광주 읍성 정도가 광주 영역이었습니다.

◇ 설경완: 지금 우리 광주라는 행정 구역을 생각해서는 안 되고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 설경완: 광주천하면 역사적인 현장으로도 많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3.1 만세운동과 광주천도 떼려야 뗄 수 없다면서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옛날 유관순 열사도 아우내장터에서 만세를 불렀잖아요. 광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지역에서 가장 먼저 만세 시위가 광주에서 3월 10일에 일어나게 되는데 이날이 작은 장이 열렸던 날입니다. 그래서 큰 장터에서 시작은 했지만 시위대가 작은 장터에서 시민 학생과 합쳐지면서 1000여명 정도가 시위에 참가했으니까 1만여 명 중에서 1000여명 대규모 시위가 광주천 작은 장터에서 일어났고요. 그리고 그때 당시 104명이나 구속이 되어서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광주천 주변에는 100여년 전에 울렸던 대한독립운동만세라고 하는 함성이 곳곳에 묻어 있을 것 같습니다.

◇ 설경완: 광주천 모래사장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자랑스러운 역사의 현장인데 그런가 하면 또 아픔의, 슬픔의 역사 현장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의병장이 총살 당한 현장이라고 이렇게 이야기가 나와요.

◆ 노성태: 우리 지역은 최대 의병 항쟁지입니다. 1909년 통계에 의하면 전국 의병 참여 전투 47.2%가 전라도 땅에서 일어났고요. 참여 의병 수의 60%가 전라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출발이 되는 매우 중요한 분이 1907년 장성에서 호남창의회맹소라고 하는 의병부대를 일으켰던 기삼연이라고 하는 의병장인데요. 기삼연 의병장이 1908년 1월 1일 전북 순창에서 체포되어서 광주 경찰서로 이송이 됐고 그러자 부하들이 의장을 구한다는 소문을 나자 일제가 재판 절차도 없이 1월 2일 1908년 광주천 백사장에서 총살을 시키게 됩니다. 불법이었던 것이지요. 아픈 현장이라는 말씀은 그래서 드리는 것입니다.

◇ 설경완: 광주천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항일운동뿐만 아니라 저희가 정말로 가슴 아파할 수밖에 없는 그런 역사를 함께 알 수 있는 것 같은데요. 광주천이라는 이름 처음부터는 쓰지 않았을 것 같고 옛날에는 다른 이름이 있었겠지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광주천이라는 이름은 1916년에 등장한 이름이고요. 그 이전에는 건천, 금계, 조탄, 서천 이렇게 불렀습니다. 중종 25년이 1530년인데 이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는 책에 보면 건천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고요. 그리고 동구에 지금 금동이라고 하는 행정명이 있습니다. 이 옛 이름이 금계리인데 금계리는 앞을 흐르는 내를 금계라고 그러니까 그 앞에 광주천 이름을 금계라고 부른 것에서 연유한 것이지요. 무등산에서 발원해서 급하게 내달린 물길이 이곳쯤에서는 고운 비단처럼 부드럽게 흘렀기 때문에 이름이 그렇게 붙여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설경완: 여러 이름마다 다 연유가 있겠는데 조탄, 서천 이런 광주천의 이름들 연유를 따져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 노성태: 조탄이라는 이름은 참 좋지요. 글자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대추 조 자 여울 탄 자니까 대추여울이라는 뜻입니다. 멋스러운 이름인데 왜 조탄이라고 불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15세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라든가 16세기 신진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대추가 광주의 토산물로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토산물인 대추와 관련이 있어 보이고요. 아무튼 유례가 어떻든 조탄이라는 이름이 굳어진 것은 적십자 병원이 있었습니다. 서남대학교 병원으로 바뀌기도 했는데 그때 조탄보라고 하는 보가 만들어지면서 조탄이라는 이름이 굳어진 것 같습니다.

◇ 설경완: 조탄, 대추여울 말씀하신 대로 멋스러운 예쁜 이름인데 이 조탄을 호로 사용한 분도 계셨다고요.

◆ 노성태: 양림동 출신의 정만종이라고 하는 분이에요. 16세기 명종 때 분이신데 호가 조계였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살던 집 앞에 흘렀던 것을 조탄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조계 할 때 계 자도 시내 계 자니까 여울 탄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조탄이라고 부르지 않고 조계라고 삼았던 것은 문학적 운치를 더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 설경완: 우리 선조들의 문학적 운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는 말씀이신데 사실 오늘 내용을 많이 준비해오셨을 것 같아요. 주어진 시간이 다 끝나서 다음에는 조금 더 많은 시간 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설경완: 지금까지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이야기 나눴고요. 저희는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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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완 기자 (kwsnow@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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