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씨 왕조의 신하들 [오늘을 생각한다]

2021. 8. 4.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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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정치인들이 너무 웃겨서 개콘이 망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TV에서 사극을 볼 수 없게 된 것은 우리 정치가 사극보다 더 사극 같아서가 아닐까. 정치의 사극화는 근래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이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을 중심에 놓고 펼쳐지는 여당 정치인들의 행각은 왕조시대의 궁중정치를 방불케 한다.

26일 대법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김경수 경남지사는 수감 직전 이낙연 전대표에게 “대통령을 부탁드린다. 잘 지켜달라“는 당부를 남겼다. 이 전대표는 김 지사의 눈물겨운 당부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대통령을 잘 모시겠다”고 답했다는 통화 내용을 공개했다. 이에 이재명 경기지사의 수행실장 김남국 의원이 발끈하고 나섰다. 이 전대표가 (통화내용을 공개해) ”일부러 ‘문심’이 여기 있다는 식으로 오해하게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민주당 적통(嫡統) 경쟁 2라운드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 찬반 시비로 시작된 적통 경쟁에는 정세균, 김두관, 추미애 등 민주당 대권주자 대부분이 참전했다. 이 리그는 누가 더 나은 정치인인가를 겨루는 경선이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을 지킬 권리’를 두고 벌어지는 후계 쟁탈전이다. 이 당의 질서는 허울뿐인 당헌이 아니라 적자 세습의 원칙으로 유지된다.

송영길 대표는 지난달 ‘대깨문(민주당 강성지지자들을 뜻하는 은어)’을 언급하며 “안이한 생각을 하는 순간 문재인 대통령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강성정치를 극복하려는 목적이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당대표부터 대권주자들, 이름없는 지지자들과 심지어 감옥에 들어가는 도지사까지 입을 모아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고 호소한다. 저들의 호소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나약한 인간이다. 저 사람들은 국민의 직접투표로 선출된 공무원들이지만 하나같이 국민을 지키는 일 보다는 대통령을 지키는데 관심이 많다. 그런 면에서 공무원이라기보다는 문씨 왕조의 신하에 가까워 보인다. 불과 4년 전에는 박씨 왕조를 살던 신하들이 있었다. 적통경쟁, 맹목적 주군 지키기, 배신자를 향한 저주… 두 왕조의 레파토리도 비슷하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제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군주제의 지배를 받는다. 지배 왕조의 성씨만 다를 뿐이다.

대통령의 영웅화·제왕화는 대통령제 국가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의 제왕정치에는 독특한 면이 있다. 문씨 왕조의 신하들에게 문재인 대통령의 의중은 그리 중요치 않은 것 같다. 그들은 실체로 존재하는 대통령보다는 전현직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상징 계보에 더 애착이 많다. 향후 그들의 정치의 동력이 되는 것은 대통령의 총애가 아니라, 그 계보를 지지하는 그룹의 선택이다. 이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대통령은 주변화되어 정치의 복판에서 멀어진다. 대통령은 언제나 고고하게 정치의 외곽에 머문 채 군주의 품위를 뽐낼 뿐이다. ‘이니 하고 싶은거 다해’라고 외치는 지지자들은 시민의 덕성을 잊은 채 백성된 도리에 열심이다. 정치인들은 자발적 신하가 되고 지지자들은 자발적 백성이 되는 풍경. 정와대 청원게시판에는 백성을 칭하는 자의 간곡한 상소문도 올라온다. 가끔은 내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 건지 헷갈린다. 민주당 대선후보 국민면접날. 면접관 김해영이 이낙연 후보에게 물었다. ”문재인정부 최장수 국무총리로서 대통령께 직언을 해서 문재인 대통령의 결정에 변화를 이끌어낸 사안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이낙연 후보는 단 한가지 사례도 말하지 못했다. 왕조시대가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정주식 직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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