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언어탐방] 올림픽: 의례 없는 도쿄

한겨레 2021. 8. 4. 05: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용석의 언어탐방]놀이의 특성은 스포츠의 제전이라는 올림픽과 매우 밀접하다. 참가 선수들이 페어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모든 제전은 조직되고 운영된다. 따라서 그 일을 맡은 사람들도 페어플레이를 해야 한다. 곧 올림픽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일을 놀이 정신으로 해야 하며, 놀이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도쿄올림픽은 두 가지 차원에서 그러지 못했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김용석 ㅣ 철학자

2021년에 치러지고 있는 ‘2020 도쿄올림픽’이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의 ‘개막 반대’를 넘어서 올림픽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힘겨운 걸음을 떼고 있다. 올림픽만큼 전 인류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내는 국제적 행사는 없다. 올림픽이야말로 인류 역사에서 여러 가치의 모범이 되는 행사라고도 한다. 그런 만큼 올림픽 그 자체의 의미를 성찰하는 일은 중요하며, 도쿄올림픽처럼 많은 난관과 실수를 품고 진행된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인간은 잘못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고대 올림피아 제전, 쿠베르탱 남작, 현대 올림픽의 시작 등 올림픽의 역사는 일반 상식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올림픽’이라는 말은 따져볼 만하다. 올림픽(Olympic)은 영어에서 유별나게 머리글자를 대문자로 쓰는 형용사다. 따라서 다른 말을 수식한다. 그 말은 ‘경기’(games)이다. 곧 올림픽은 우리나라에서 ‘올림픽 경기’(Olympic games)를 줄여서 쓰는 말이다. 프랑스어(Jeux olympiques)를 비롯한 대부분 서구어에서도 ‘경기’라는 말은 꼭 들어간다.

경기 또는 게임이란 무엇인가. 우리말 사전이 외래어 게임을 “규칙을 정해 놓고 승부를 겨루는 놀이”라고 정의하듯이 그건 놀이의 일종이다. 영어는 놀이(play)와 게임을 가리키는 단어가 별도로 있지만, 대부분의 서구어에서는 놀이와 게임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 그만큼 게임과 스포츠는 본질적으로 놀이 형식을 띠고 있다는 뜻이다.

놀이란 무엇인가. <호모 루덴스>, 곧 ‘놀이하는 인간’의 작가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의 다양한 특성을 설파했는데, 그 가운데서 올림픽과 연관해 관심 있게 볼 것은 ‘장소의 격리성과 시간의 한계성’이다. “놀이는 제한된 시간과 장소에서만 ‘노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놀이는 “놀이 고유의 과정과 의미를 갖게” 된다. 시공간의 한계에서 놀이는 스스로 질서를 창조하며, 그렇게 창조한 “질서 그 자체가 된다.” 이러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정해 놓는 것이 놀이의 규칙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놀이’는 그 자체로 ‘공정한 놀이’(fair play)여야 한다. 곧 ‘페어플레이’는 높은 수준의 성취를 이룬 놀이가 아니라, 놀이가 놀이이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이런 놀이의 특성은 스포츠의 제전(祭典)이라는 올림픽과 매우 밀접하다. 참가 선수들이 페어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모든 제전은 조직되고 운영된다. 따라서 그 일을 맡은 사람들도 페어플레이를 해야 한다. 곧 올림픽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일을 놀이 정신으로 해야 하며, 놀이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도쿄올림픽은 두 가지 차원에서 그러지 못했다.

놀이의 제전으로서 올림픽의 근간을 이루는 것에는 ‘공간의 단위’에서 유래한 개념과 ‘시간의 단위’에서 유래한 개념이 있다. 전자는 스타디움(Stadium)이고, 후자는 올림피아드(Olympiad)이다.

스타디움은 그리스어 ‘스타디온’에서 유래하는데, 600보폭에 해당하는 길이의 단위로서 약 180~200m에 해당한다. 올림피아 제전의 초기에는 주로 육상 경기를 했는데 반드시 넓은 관중석이 있었다(현대의 스타디움에서도 경기하는 공간보다 관중석의 공간이 더 넓다). 출발선, 도착선, 관중석은 스타디온의 기본 요소였다. 제전은 종교의식과 밀접했기 때문에, 스타디온은 4년에 한 번씩 지중해 지역에 널리 퍼져 살던 그리스인들이 순례하듯이 정기적으로 회합하는 장소였다. 관중 없는 올림픽은 없었고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런데 도쿄올림픽 경기는 무관중으로 진행되고 있다. 방송과 온라인의 원격 관중으로 변명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매체는 관중석을 조명하지 않기 때문에 제전의 많은 것을 은폐한다. 시청자의 격정과 환호 속에 문제의식은 묻히게 된다. 디지털 문명이 가속화할수록 실제 관중이 있는 올림픽 경기는 더욱 중요해진다. 삶의 균형은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이번에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라는 올림픽 구호에 “다 함께”를 추가했음을 자랑스럽게 강조했다. 그러나 올림픽은 원래부터 공동체, 곧 ‘다 함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경기는 공동체적 소통의 한 방식이다. ‘다 함께’를 실천하는 핵심 요소인 관중이 없는데 그런 구호를 외치는 건 씁쓸한 자가당착이다. 이건 제전 진행의 페어플레이가 아니다. 그 구호는 오히려 다음 파리올림픽이 다시 관중 가득한 스타디움에서 치러질 때 추가되었어야 한다.

시간의 단위에서 유래한 개념인 올림피아드는 경기가 열리는 4년의 기간을 의미한다. 곧 올림픽 개최 시기의 간격을 기본으로 하는 시대 계산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고대인들에게 4년이라는 시대 기준점은 매우 중요했다. 수많은 도시국가로 이루어진 그리스 전역에서 통일된 시대 계산 체계는 없었는데, 올림피아 제전이 정기적으로 개최됨으로써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다. 그 후로 4년이란 단위는 서구 문화 곳곳에 스며들었다.

올림피아드의 시대 계산 원칙은 현대 올림픽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도쿄올림픽은 공식적으로 32회 올림픽이지만, 실제로는 29번째 대회이다. 1·2차 세계대전으로 세 번의 올림픽을 건너뛰었지만, 시대 계산으로는 그 회차들도 모두 계산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올림피아드의 정신이자 원칙이다. 도쿄올림픽은 이를 깬 것이다. 올림픽은 5년 만에 열렸고, 앞으로 3년 후에 열릴 것이며, 이런 격식 파괴는 반복될 수 있다. 19세기 말 쿠베르탱을 비롯한 선구자들은 올림피아 제전의 정신과 원칙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현대 올림픽을 창시했다. 도쿄올림픽 개최는 취소되었어야 했다. 그럼으로써 더욱 의미 있게 32번째 올림피아드로 남을 수 있었어야 했다.

이제 토마스 바흐를 비롯한 올림픽 관계자들에게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놀이하는 아이의 심정으로 동화의 한 구절을 들려주고자 한다. ‘어린 왕자’와 친구가 된 여우가 말했다. “언제나 같은 시각에 와 주는 게 더 좋아. 이를테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네 시가 가까워 올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그리고 네 시가 다 되었을 때 난 안절부절못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알게 되겠지! 그렇지만 아무 때나 온다면 나는 몇 시에 맞추어 내 마음을 단장해야 하는지 모르잖아. 의례(儀禮)가 필요해.” 올림픽은 인류사적 의례이다. 예를 갖추어서 개최하고 진행해야 한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