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외상의 디지털식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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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불하는 재미로 출근하다가 월급날은 혼자서 가슴을 친다. 요리조리 빼앗기면 남는 건 빈 봉투….” 왕년의 인기 가수 최희준이 1960년대에 부른 ‘월급봉투’란 노래다. 외상과 가불로 근근이 살림을 꾸렸던 산업화 세대 월급쟁이들의 애환을 보여준다. 대공황 시절 미국도 사정이 비슷했던 모양이다. 1925년 ‘위대한 개츠비’를 쓴 미국 소설가 피츠제럴드가 출판사 편집자와 나눈 편지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가불(advance payment)’이다.
▶신용카드의 등장은 가불을 구시대 유물로 만들었다. 신용카드만 있으면 회사에 아쉬운 소리 할 것 없이 월급날까지 버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신용카드는 발급 요건이 까다롭고 할부 거래는 비싼 수수료를 물어야 한다. 그런데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기술이 구시대 ‘무이자 외상’을 부활시키고 있다. 호주의 애프터페이, 스웨덴의 클라르나 등이 제공하는 “지금 사고, 돈은 나중에 내라”(Buy now, pay later)는 BNPL 서비스가 그것이다.
▶이들은 소비자가 온라인 쇼핑몰에서 물건을 사면 물건값을 대신 내주고, 길게는 6주에 걸쳐 후불로 대금을 받는다. 소비자가 제때 갚기만 하면 100% 공짜 외상이다. 대신 물건값의 2~4%에 해당하는 외상 거래 수수료를 판매자에게 받는다. 소비자는 돈 없이 물건을 살 수 있어 좋고, 판매자는 그렇게라도 매출을 늘려서 득이 된다. BNPL업체의 수입원은 80%가 수수료, 20%는 연체 때 소비자에게 물리는 연체료다.
▶이런 모델을 가능케 하는 것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기술이다. 소비자는 앱을 깔고 이름과 생년월일만 입력하는데, AI가 연체 가능성이 높은 고객을 걸러낸다. 카드 수수료를 아까워하거나, 빚내기를 꺼리는 MZ세대, 소득이 일정치 않아 신용카드 발급이 안 되는 비정규직 근로자 등이 주 고객이다. 호주에선 “애프터페이했다(afterpaid)”는 말이 유행어가 되고, 미국에선 MZ세대의 20%가량이 BNPL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트위터 창업자가 엊그제 애프터페이를 290억달러(약 33조원)를 주고 인수했다.
▶요즘 핀테크는 투자 생태계까지 바꾸고 있다. 블록체인 기반 NFT(대체 불가 토큰) 기술 덕에 고가 미술품도 소액 분할 투자가 가능해지면서 MZ세대가 예술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빌딩 지분을 잘게 쪼개 매각하는 기법의 등장으로 소액 투자자도 ‘건물주’가 될 길이 열렸다. 디지털 세상에선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지경이다. 수십 년 전 ‘외상’까지 부활시켰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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