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적 관점에서 봐야 '식민지 조선' 제대로 보이죠"

강성만 2021. 8. 3.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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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한국 국제관계사' 영문판 낸 구대열 명예교수
구대열 교수는 퇴임하던 2010년 <삼국통일의 정치학>(까치)을 펴내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치적 문맥 속에서 신라의 통일전략과 전술을 살피기도 했다. 그는 전쟁 대신 평화로 가는 외교의 핵심이 뭐냐는 질문에 ‘균형’이라고 답했다. 평화를 위한 균형으로 가려면 “힘을 키우고 동맹을 맺어 안보를 굳건히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한말 주한 외교관 중 가장 친한적이었다는 호러스 알렌 미국 공사조차 고종을 두고 로마가 불타는 것을 보며 즐겁게 류트(발현악기)를 연주한 네로 같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해요. 한말 조선에 대한 미국과 영국 등 열강의 이런 부정적 평가는 일제 식민 시기 내내 유지됩니다.”

구대열(76) 이화여대 정외과 명예교수는 26년 전에 ‘일제시기 한반도의 국제관계’라는 부제를 단 묵직한 학술서 <한국 국제관계사 연구>(전 2권, 역사비평사)를 냈다. 영국과 미국의 정부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일제 강점기 한반도 외교 문서를 토대로 식민지 조선 문제에 주변 열강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파고든 책이다. 저술의 요지는 이렇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 문제’는 국제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열강이 1945년 한국의 해방과 독립 문제를 다룰 때 취한 태도와 정책은 한일합방(1910년) 때와 동일하다. 한말 조선 정부와 사회상를 부정적으로 바라본 열강은 1945년에도 한국은 서구 물질문명 기준에 도달하지 못해 독립할 능력이 없다고 봤다.’

이 저술을 보완해 지난 4월 영국 출판사 ‘르네상스 북스’에서 영문판을 낸 구 교수를 지난 1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구 교수가 최근 펴낸 <한국 국제관계사 연구-일제시기 한반도의 국제관계> 영문판.

그는 2~3년 전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출간한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고대, 고려, 조선, 근대편) 4권의 편찬위원장을 맡았다. 그를 포함해 국제정치학자 서너명이 역사학자 사십여명과 협력한 이 작업이 영문판 출판의 계기였단다. “한국 외교사를 정리하면서 우리 대외관계의 일정한 패턴도 알게 되었고 외교사와 독립운동사 관계도 다시 살폈어요. 새로 나온 연구 성과도 확인할 수 있어 영문판을 내자고 맘먹었죠.”

그가 처음 책을 낼 때는 외교사를 독립운동사와 분리해 다뤘지만 영문판은 독립운동이 국가간 외교 이전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평가가 필요하다는 관점을 취했다. “책을 쓰던 1990년대는 독립운동에 과하게 의미 부여를 하던 시기라 이건 아니다는 생각에 외교사와 독립운동을 분리했죠.” 그는 “조선 총독부를 두고 열강은 ‘서울 정부’라는 말까지 썼고 한국 독립운동에 우호적이었던 중국 정부조차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일제 시기는 한국 외교의 공백기”이지만 “임정 외무부장 조소앙 선생이 1942년 충칭에서 미국 대사를 몇 차례 만나고, 워싱턴에서도 태평양 전쟁 발발 전까지는 미운오리새끼 취급받던 이승만 등 독립운동가들이 미 국무부 관리를 만나는 등의 활동은 외교 전사로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 독립운동가 활동을 기록한 미국 자료도 많더군요. 1919년 파리강화회의 참석차 배편으로 파리를 향하던 김규식 선생이 흑룡강 치치하얼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독립청원서 초안도 영국 외교 문서철에서 찾았죠. 당시 콜롬보에 있는 영국 첩보대가 입수했죠. 실제 청원서는 초안보다 온건하더군요.”

3·1운동의 기원에 대한 해석도 영문판에서 달라졌단다. 그는 1968년부터 5년 동안 <한국일보> 기자로 일하다 영국 유학을 떠나 런던정치경제대학에서 3·1운동 당시 한반도 국제관계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립운동 역량이 축적돼 3·1운동이 일어났다는 게 일반적 해석이지만 책이 나오고 일본 쪽 자료를 보니 고종의 죽음이 갖는 상실감이 크게 작용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시절 조선인들은 군주인 고종이 있어 조선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고종의 죽음으로 이제 진짜 일본 사람이 됐다고 좌절한 거죠. 그게 운동의 폭발로 이어졌어요. 조선인들이 총독부가 장려한 잠사를 위해 심은 뽕나무를 베어버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영국의 한국위원회와 미국의 국무부 극동국 한국 담당관은 1944~45년 한국 문제를 두고 의견 조율을 하는데 결론은 한국은 독립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문맹률과 한국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상 그리고 근대 국가를 경영할 능력이 있는 고등교육 이수자가 적다는 이유였죠. 이런 평가는 구한말부터 지속한 것입니다. 선교사나 통역사 영향과 일제의 악선전 탓도 있죠. 일제 말로 가면 중국도 가세합니다. 중국은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도 뒤에서는 미·영 열강에 한국인들은 자기들끼리 싸운다며 부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미국 문서를 보면, 충칭 주재 미국 대사가 조소앙을 만나 중국에 관해 묻자 ‘중국은 우리를 지배하려고 한다’고 속삭이듯 답했다고 해요.”

일제시기 한반도 국제관계 담은
26년 전 저술 지난 4월 영국서 출간
미·영 문서고 6년동안 훑어 정리

“일제 때 열강은 한국 문제 도외시
한말 부정적 인식 45년까지 지속
방대한 선교사 자료 연구 시급”

식민 시대 한반도 국제관계를 아는 게 왜 중요할까? “외국 학자들은 왜 한국 학자들은 한국 문제를 한국 관점에서만 보느냐고 말해요. 세계사적 관점에서 한국 위상을 정확히 보고 한국 문제에 접근해야 그 시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요.” 그는 한 예로 영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어 한일 강제병합의 뒷배가 되어준 배경을 짚었다. “1910년 무렵 영국에게는 인도 제국이 가장 중요했고 그다음은 중국과의 무역이었어요. 당시 영국의 대중국 무역량은 동아시아 다른 나라를 다 합친 것보다 많았죠. 영국은 러시아가 한국을 장악하면 중국의 ‘정치적 중심’인 북경이나 천진 지역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해 러시아 남하를 막으려고 했죠. 영국은 이란과 아프간에서는 러시아와 타협했지만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았어요. 장사를 위해서 강하지는 않지만 안정적인 중국을 원했거든요.” 그는 경술국치 때 미국이 가장 우려한 것도 한반도의 미국인 사업가들이 치외법권 특혜를 계속 누릴 수 있는지였다고 책에 썼다.

그는 이 책 저술을 위한 자료 수집에 6년이 걸렸다고 했다. “미국 문서보관소에서 1910년 한 해 자료만 찾는 데 한 달이 걸리더군요. 1907년부터 2년 동안 서울 총영사를 지낸 토마스 새먼즈 자료만 백과사전 94권 분량이었죠. 이 중 5%가 광산 이권이나 선교사 활동 등 한국 내용이었어요. 일제 시기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 문건도 방대한데 미국이나 영국 선교본부 곳곳에 흩어져 있어요. 한 두 사람이 할 일은 아니고 팀을 짜 자료도 모으고 연구하면 좋겠어요.”

구대열 교수가 2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그는 이번 저술의 학술적 가치를 하나 꼽아달라고 하자,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한국에 대한 이해를 놓고 서로 양해한 구두 합의로 알려진 ‘가쓰라-태프트 협약’(1905년 7월)을 새롭게 해석한 것을 들었다. “밀약이라면 미 국무부 어딘가에 자료가 있어야죠. 하지만 미 문서보관소에서 끝내 찾지 못했어요. 미 국무장관에게 올라가지도 않았고 의회를 통과하지도 않았어요. 태프트 미 육군 장관이 일본의 한국 장악은 동아시아 세력균형을 위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힌 것에 불과해요. 일본 총리와의 구두 의견교환일 뿐이죠. 1920년대 초에 미국 의회에서 이런 내용의 문서가 나오자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미국이 한국을 팔아먹었다며 참회하라고 외치고 한국 독립 주장에 활용하면서 잘못된 해석으로 이어졌죠.”

그는 전문가 도움을 얻어 영문판 번역을 직접 했다. “책 분량의 4분의 1은 영어 문서입니다. 이 자료를 찾은 제가 직접 해야 정확히 옮길 수 있다고 생각했죠.”

오늘날 한국 외교는 지난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한국은 1945년에는 미국 등 열강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지만 경제적으로 부흥한 지금은 미국이 2개 사단을 주둔해 지켜야 할 만큼 중요해졌어요. 특히 북핵 문제나 중국의 부상도 겹쳐 위상이 더 올라갔어요. 약소국은 강대국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다가 안 되면 한쪽에 기댈 장치가 있어야 해요. 오늘날 그 장치는 한-미 동맹이죠. 중국이 우리 안보를 지켜줄 수는 없으니까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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