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의반도] 영웅 아닌 이들과, 함께 스미고 번지는 춤

한겨레 2021. 8. 3.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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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목포 신항만에 ‘정박’ 중인 세월호(지난 7월29일). 분노는 평범한 이들과 함께 공유되어 이어진다.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지수 제공
상처에 대한 공감과 치유는 단순히 아픔을 이해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앎’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항쟁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5·18 참여자 중 상당수가 무슨 대단한 민주주의에 대한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이유 없이 죽어가는 누군가를 보았을 때 저도 모르게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는 대답을 들은 적이 있다. 공감이 의지나 의식에 의해 일어나지 않으며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는 참여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5·18 당시 ‘항쟁지도부 기획실장’이었던 김영철 열사다. 그는 전남도청을 마지막까지 사수하다가 신군부에 체포되었고 이후 고문을 견디지 못해 머리를 벽에 찧어 자살을 시도했다. 1981년 성탄절 특사로 출소하지만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인 뇌수종을 겪다가 조선대병원에서 50살에 생을 마감하고 만다. 김영철 열사의 삶과 죽음은 역사이지만, 1998년 8월16일 그가 떠난 이후 남겨진 가족들은 남편이자 아버지가 겪었던 항쟁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을 것이다. 아니, 열사의 가족이라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둥, 내 마음대로 짐작하고 상상했다는 게 옳을 것이다. 그래서 2021년 망월동 묘역에서 마주한 그녀의 얼굴은 내가 멋대로 떠올렸던 5·18 유가족의 얼굴을 희미하게 지워버렸다.

그녀를 만났을 때, 자신이 ‘5·18 유가족’으로만 소개되는 것에 위화감을 표했다. 그녀는 열사의 딸인 동시에 춤꾼으로서 만나기를 원했던 것이다. 유가족으로서만 사는 게 아니라, 그녀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녀는 몸짓으로 세상과 만나기를 원했고, ‘미제 음식’이라는 콜라를 망월동 묘역에 뿌려주며 “아버지가 좋아했다”고 말할 때, 열사의 유가족이기보다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한명의 딸이었다. 5·18의 유가족이라는 사회적 지위와 아버지를 잃은 딸은 완전히 겹쳐지지도 정확하게 일치하지도 않는다. 그 중첩되는 모습들 사이에 고통과 슬픔이 존재한다는 것을 순식간에 체감했다. 이 때문에 그녀의 춤은 ‘독무’가 아니라 어쩌면 항상 이미 ‘군무’의 상태였을 거라는 느낌을 묘지와 그녀 사이에 앉아서 감지하게 되었다. 그녀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이런 점에서였다.

유가족이자 딸이자 춤꾼인 그녀의 공연을 몇차례 감상한 적이 있었다. 푸른 조명과 어두컴컴한 배경 속 빨간 꽃을 든 그녀의 모습은 떠나간 사람에 대한 애도와 함께, 그럼에도 끝나지 않는 고통에 대한 표현이었다. 그 고통은 무대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며들었고 나 또한 그때 그녀가 자신을 소개했던 순간의 주저함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다르게 싸우는 춤꾼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항쟁공간은 비록 평평한 무대이지만,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로부터 싸우는 방식을 고안했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 아래 관객들은 감상평을 메모하고 포스트잇을 붙여 함께 춤추자고 제안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 메모들은 가상공간에 올라갈 때 디지털 신체가 되어 사람들에게 스미고 번져 또 다른 의미의 춤이 된 것이다.

그녀의 이런 태도는 그저 자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유가족에 대한 사회적 담론들도 그러하지만 5·18의 당사자들에 대한 이미지를 과잉 수사를 통해 영웅 서사화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2011년 구술자료에 따르면 5·18 항쟁 참여자 한분은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저도 내가 무슨 영웅, 일단 학생들이 영웅을 만들어 노니까, ‘민주의 교과서인 5·18 민주화 그 대상자님이 오신다’고 애기를 합니다. 그렇게. 진짜 영웅화를 시켜놔요. 나는 영웅이 아니잖아요. 그냥 참석했던 사람이지. ‘정신’이 없던, 참석했던 사람이지. 근데 그 사람들은 민주정신을 가지고… 대단한 이슈를 가지고 광주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을 만들어놔요. 사실 나 아무것도 없어요.” 대단한 이념 없이도 항쟁에 스며들었던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과잉된 이미지를 낯설어한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데, 항쟁이라는 말을 너무나 신성하게 여기는 담론들이 많아질수록, 도리어 사람들을 짓누르는 속박과 두려움이 되고 있는 셈이다. 항쟁은 오히려 가장 평범한 곳에서 일어났는데도 말이다.

5·18이 광장을 벗어나고 정치적 공방에 휘둘릴 때면 유가족과 유공자들 또한 소모적인 정치적 시시비비에 휘말리곤 한다. 그들의 고통은 함께 감내할 만한 것으로 스며들기보다는, 오히려 정박되어 통째로 삼켜내야 할 것이 되어버린다. ‘5·18 가족’이라는 것이 마치 ‘운명’이라도 된 양 그들에게 답답함을 안겨주는 것이다. 물론 이런 말은 국가폭력이 초래한 고통이나 트라우마를 조금은 외면해도 된다거나 외면하자는 것일 수 없다. 직접적 피해자뿐 아니라 사건이 일어난 주변의 목격자, 유가족, 사후노출자들이 경험하는 트라우마 또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유가족의 경우, 5·18과 관련한 이유로 차별을 경험했거나 혹은 5·18 가족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심리적 압박감을 받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광주트라우마센터 <집단트라우마와 사회적 치유> 자료집, 2021년 6월) 달리 말해, 5·18을 통해 일어나는 트라우마는 국가적, 사회적으로 치유해야만 하는 공통의 유산이다.

상처에 대한 공감과 치유는 단순히 아픔을 이해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앎’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항쟁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5·18 참여자 중 상당수가 무슨 대단한 민주주의에 대한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이유 없이 죽어가는 누군가를 보았을 때 저도 모르게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는 대답을 들은 적이 있다. 공감이 의지나 의식에 의해 일어나지 않으며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는 참여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화가로서 평평한 화선지 위 무대에 덧붙여진 메모지처럼 중첩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둘 그려내고자 한다. 그 모습은 함께 춤을 추는 것처럼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다. 한국화의 멋들어진 산수나 초상화를 그리고 싶은 것이 아니다. 스승에서 선배로 이어지는 한국화의 계보에 머물지 않고 그 바깥으로 나왔을 때, 개인적 이념에 따른 막연한 인간관계를 그리며 만족하는 것보다 더욱 시급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과거의 상처가 여전히 현재에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상처를 내버려두면 둘수록 절대로 아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광주의 한국화가로서 동시대의 현재의 상처에 ‘참여’하려는 이유는 분명하다. 제어할 수 없이 화선지로 스며드는 먹처럼, 스밈과 번짐이야말로 전통 회화가 갖는 중요한 회화 원리이자 사람들이 살아가는 원리다. 옛사람들이 스밈과 번짐을 조형적 원리로 삼았던 것은, 이념적 이상 세계를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계가 스밈과 동시에 번져가고 있음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참여하는 항쟁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멈추지 않고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다. 목포로 이주한 지 1주일, 출근길에 신항만을 지나친다. 신호대기 중 아무렇지 않게 멈춰 있는 앞 유리창 안으로 정박되다 못해, 땅에 붙잡혀 녹슬어버린 세월호가 스며든다. 4·16 참사가 일어났을 때 나는 <연결고리>(2014)라는 작품을 하는 중이었다. 세월호의 고통은 항구에만 정박되어 있지 않고 이 땅 곳곳으로 번졌다. 그 번짐은 광주에 있는 나에게도 스며들어 작업을 하는 와중에도 뉴스가 중계되는 화면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작품이 전시되었을 때 한명의 관람객이 말을 건네며 다가왔다. “세월호의 아이들 같아요.” 작품에서 관람객은 아픔도 함께 떠올렸고, 그때 작품은 하나의 기억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얼마 전 서울시장은 기억공간 철거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런 일방적인 조치에 유가족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도 함께 분노했다. 우리는 이미 아픔을 겪어버렸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신항만에 녹슨 배가 붙잡혀 있더라도, 그리고 5·18이 일어난 지 41년이 지났어도 고통은 여전히 사람들과 함께 번지고 스며들고 있다. 평범한 오늘도, 여전히 항쟁은 스미고 번지는 중이다.

나지수 | 광주모더니즘

화가. 한국화 전공자로 광주예술고, 전남대 학사·석사(미술학) 졸업. 2016년 어등미술대전 우수작가상 수상 외 개인·단체전 참여. 한국화 특성을 활용해 보이지 않는 인간관계, 시대와 세대의 변화를 포착하고 구상해내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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