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는 발레리나' 박윤수, "잔향을 남기는 춤을 추고 싶다"

2021. 8. 3.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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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 함부르크 발레단 입단
60명 단원 중 다섯 명뿐인 솔리스트
"스스로 답을 찾는 발레, 자유로운 발레 만난 계기"
오는 9월 '실비아' 주역 발탁..새로운 도약
발레리나 박윤수는 열여덟에 유럽의 대표 발레단인 함부르크 발레단에 입단했다. 발레단 최초이자 유일한 한국인으로 솔리스트 자리에 오른 그는 존 노이마이어 예술감독과 단원들의 신뢰를 얻으며 유럽의 심장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다. 박윤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발레, 잔향을 남기는 춤을 추고 싶다”고 말했다. 박해묵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윤수, 네가 춤을 추면 가만히 보고 있게 돼.” (존 노이마이어 예술감독)

‘슈베르트의 현악 5중주 C장조’에 맞춰 아름다운 동작들이 하나하나 입혀졌다. 고인이 된 발레리나 콜린 스콧(Colleen Scott, 1945~2021)을 기리는 함부르크 발레단의 갈라 무대. 일주일에 세 번씩 PCR 검사를 받으며 이어온 지난 시즌을 마무리하는 갈라에서 박윤수는 콜린 스콧 역할로 관객 앞에 섰다. “가장 아끼는 친구를 떠나보내는 감정”이 그의 손짓, 몸짓에 실려 전달됐다. 오랜 시간 함께 한 동료, 시대를 살아온 발레리나와의 이별이 남긴 감정의 무게가 무대에 켜켜이 쌓였다. 발레단의 존 노이마이어(John Neumeier) 예술감독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을 잡아줬다고 한다. 콜린 스콧의 남편인 이반 리스카(Ivan Liška) 전 바이에른 국립발레단 감독은 “감정이 울컥해 들락날락 하면서 봤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냥, ‘고맙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의 춤을 통해 먹먹하게 밀려든 드라마가 ‘감정의 숲’을 이룬 날이었다.

‘호두까기 인형’을 보고 발레리나를 꿈꾼 소녀의 이름 뒤엔 ‘한국인 최초’라는 수사가 따라온다. 함부르크 발레단에 입단한 최초의 한국인, 이 발레단 최초의 한국인 솔리스트. 팬데믹으로 발이 묶여 2년 만에 귀국한 발레리나 박윤수(32)를 최근 만났다. 그는 지난 갈라 무대를 떠올리며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박윤수가 지향하는 발레리나로의 춤이 온전히 녹아든 무대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발레를 시작한 박윤수는 선화예중을 거쳐 선화예고 시절 최고 권위의 주니어 발레 콩쿠르인 스위스 로잔콩쿠르에 나간 것이 계기가 돼 독일 함부르크 발레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 한국인이 없는 곳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서고 싶다는 생각에 함부르크 발레학교를 선택했다”며 “이 곳에서 스스로 답을 찾는 발레를 배웠다”고 말했다. 박해묵 기자

발레를 시작한 것은 ‘우연한 만남’이었다. 동화처럼 예쁜 세계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 발레를 하겠다고 부모님을 졸랐다고 한다. 아버지의 반대에 ‘단식 투쟁’도 불사했다. 괜한 이끌림이 아니었다. 토슈즈를 신고 일 년도 되지 않아 선화예중에 합격했다. 친구들의 응원을 받으며 나간 서울국제콩쿠르에서 러시아 발레리나 나탈리아 마카로바(Natalia Makarova)의 눈에 띄었다. 그의 이름을 딴 상을 수상한 것은 발레리나 박윤수가 날개를 달게 된 계기였다. 이후 로잔 콩쿠르(2004년)에 나갔고, 함부르크 발레학교로의 입학으로 이어졌다. “여러 학교에서 제안이 왔는데, 한국인이 없는 곳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서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혈혈단신 독일로 향한 이유였다.

독일에서의 첫발은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한국에선 해보지 않은 것을 한다는게 재밌더라고요. 학교에선 안무를 직접 한다는 것이 신기했어요. 안무로 시험을 보고, 의상부터 조명까지 학생들이 알아서 무대를 만드는 거예요.” 안무가로의 역량도 탁월했다. 발레학교 시절, 12분 짜리 안무로 만든 ‘시간의 지속’이라는 작품에선 존 노이마이어로부터 최고 점수를 받았다.

발레리나 박윤수가 27일 오후 서울 용산구 헤럴드사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해묵 기자

함부르크 발레학교에서의 수업 방식은 발레리나 박윤수의 기반을 닦아줬다. “스스로 답을 찾는 발레”를 배우고, “자유로운 춤”을 알게 된 때였다. “한국에선 동작을 잘못하거나 고쳐야 할 때 선생님께서 알려주지만, 독일에선 스스로 어떻게 잘못된 건지 깨달아야 하더라고요.” 대화를 통해 주고받는 문답은 무용수 스스로 자신의 몸을 이해하는 길을 제시한다. “처음엔 적응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덕분에 제 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답이 나와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어요.” 하나의 방식과 춤을 고집하지 않는 자유로움은 무용수 박윤수가 더 많은 시도와 도전을 할 수 있게 했다. “다른 걸 해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시키는 대로 추는 춤,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한 춤이 아니라 스스로 스펙트럼을 넓힌 계기였어요.”

학생 시절엔 존 노이마이어의 눈에 띄어 열여덟의 나이로 함부르크 발레단에 입단(2007년)했다. 올해로 14년차. 2018년 5명밖에 되지 않는 솔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유일한 한국인이자, 최초의 한국인으로 타국에서의 생활이 녹록치는 않았다. 14년의 시간엔 어렵고 힘든 날들을 버티고 이겨낸 흔적도 남아있다. “발레단에서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다 보니 힘든 때도 있었어요.”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의 동굴 안으로 파고 들어가기도 했다. “난 왜 저렇게 못할까, 나도 키가 작았으면 어땠을까, 내가 만약 한국에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굳이 필요치 않은 가정을 하면서 스스로를 갉아먹을 때였어요.” 발레단을 함께 하는 단원들의 신뢰와 지지는 박윤수가 슬럼프를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였다. “더이상 내려갈 곳이 없으니 올라가게 되더라고요. (웃음)그 시기를 지나고 나니, 저를 둘러싼 바운더리가 단단해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됐어요. 불확실한 고민 대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장점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고요.”

발레리나 박윤수가 27일 오후 서울 용산구 헤럴드사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해묵 기자

박윤수의 강점은 ‘동서양의 조화’다. 170cm의 큰 키로 서양인의 체형을 가지면서도 동양인의 감성을 담아내는 것은 유일무이한 존재로의 무대를 보여준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들에 감정이 더해지면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극적이다.

“무대에 설 때 안무의 순서, 테크닉, 감정들을 고민해요. 테크닉은 기본이에요. 동작을 깨끗하게 전달해주는 것도 감정의 일부니까요. 그 다음은 온전히 감정을 전달하는 거예요. 감정은 이 모든 것을 감싸고 있어요.”

박윤수가 만들어내는 감정의 드라마는 사유의 결과다. 그는 “몸으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선 꾸준히 노력하는 것 밖에는 답이 없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요.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장면, 장면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 잘 짜여진 가이드라인 안에서 나만의 가지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 답을 찾을 때까지 고민하는 수밖에 없어요.”

토슈즈를 신은지 30년. 그는 늘 ‘새로운 오늘’과 ‘후회없는 무대’를 그린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가면 바로 새 시즌의 시작이다. 박윤수는 오는 9월 함부르크에서 막을 올리는 ‘실비아’의 주역을 맡았다. 또 한 번의 도약이 될 무대다.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거나, 스러질 지언정 발레를 안 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요. 어떤 가정을 해도 춤을 춘다는 가정 하에 모든 것을 움직일 만큼 제가 가장 좋아하고, 후회하지 않는 것이에요. 항상 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제 공연을 보는 동안은 관객들에게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마음을 움직이는 춤, 잔향을 남기는 춤을 추는 발레리나이고 싶어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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