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령 휴게소의 콜라 한잔, 피로회복제가 따로 없네

글·사진 김채울 2021. 8. 3. 11:3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기부천사의 백두대간 종주기 <3> 육십령 구간
어린이재활병원 기부하는 28세 여성 마라토너, 홀로 백두대간 670km 종주 도전
<월간산> 백두대간 종주기_김채울
결국 쉬고 싶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텐트를 설치했다
어느덧 집 나온지 5일차. 오늘은 초반에만 잠깐 컨디션이 좋았다가 컨디션이 금방 다시 떨어져서 결국은 목표했던 육십령까지 가지 못 하고 일찌감치 장사를 접었다. 어제 더위를 먹은건지, 좀처럼 기운이 나지 않는다. 처음엔 꼭 30일 안에 종주를 끝내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는데, 걷다 보니 왜 굳이 그런 것에 집착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는 결과나 성과에 집착하곤 했는데, 이제는 결과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현재를 즐기고 여유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물 흐르듯 흐르는 인생을 살고 싶다.
새벽 4시 반, 다시 길을 이어가는 나를 위해 영록오빠와 하영씨가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 다시 복성이재 들머리까지 태워줬다. 졸린 눈을 비비며 운전대를 잡은 영록오빠와 하영씨의 모습을 보며 어찌나 고맙던지, 이 감사함을 꼭 보답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한 인연 속에 행복을 가득 안고 출발하는 5일차의 아침이다. 복성이재에서 시작해 매봉까지는 무난한 길이 이어졌고, 그 이후 봉화산까지 어둠을 헤치며 홀로 어둠 속을 헤치며 걸어나갔다. 길은 전반적으로 완만해서 좋았는데, 중간중간 어제와 같은 야생길이 나와서 풀들을 헤치며 걷는다고 풀에 맺힌 이슬들로 바지와 신발이 잔뜩 젖었다. 오늘은 내 키만한 수풀도 여러 번 헤치며 지나왔더니 티셔츠까지 젖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쥐 맞은 생쥐 꼴이다. 하지만 어제 워낙 제대로 경험을 해봐서 그런지 이 정도면 썩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원래 오늘은 혜연언니가 육십령 휴게소로 찾아오겠다고 한 날이다. 내가 비 새는 텐트로 고생하는 걸 보시고 언니가 텐트를 빌려주겠다고 하신다. 육십령에서 6시에 만나기로 해서 그 전까지 도착해야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는데, 휴식도 거의 하지 않고 부지런히 걷는데도 거리가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거리가 줄어들 질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안에 육십령에 도착할 자신이 없어 결국 이른 아침부터 언니에게 오시지 말라고 말씀드렸다. 비록 만나진 못 했지만 언니가 찾아와주시겠다고 한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감사했다. 대간을 걸으며 매일매일 인복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이전까진 육십령까지 가야 된다는 생각에 빠른 페이스로 걸었는데, 이후 마음의 여유가 생겨 점심도 1시간동안 천천히 먹고,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종주를 시작한지 며칠 안 되긴 했지만, 종주를 하며 느끼는 건 난 생각보다 느리게 걷는 걸 좋아하는 것이다. 워낙 성격이 급해서 운동을 할 때에도 일상에서도 항상 ‘빨리빨리’ 스타일이고, 그래서 사실 걷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걸을 바에는 뛰자는 주의다. 하지만 요 며칠간 바람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며 느지막하게 걸으니 이것도 참 좋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쉼 없이 오르는 것보다는 쉬고 싶을 때 푹 쉬고 또 다시 걷고 그렇게 여유를 가지며 걸으니 더 기분이 좋다.
느리지만 조금씩 걷다 보니 어느새 중고개재에 도착했고, 심호흡을 한 뒤 백운산으로 향한다. 백운산이 오늘 코스의 가장 난이도 높은 구간이라는 후기를 봐서 은근히 긴장되었다. 중고개재에서 백운산까지의 거리는 2.4km밖에 안 되지만 상승 고도가 높은데, 확실히 꽤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져 숨이 차 여러 번 쉬며 올랐다. 전날 영록오빠가 배낭이 너무 무겁다고, 뺄 거 있음 빼고 택배로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도무지 뺄 게 없다. 음식을 너무 많이 들고 다니는 게 가장 큰 요인인 것 같은데, 음식은 앞으로 먹어야 하니 빼기가 뭐했다. 식량을 일주일치씩 들고 다니고 있는데, 생각보다 마을을 자주 들를 수 있어 이번 음식들만 다 먹고 나면 앞으로는 식량을 조금씩만 들고 다녀야겠다.
백운산 정상까지 꽤나 힘들게, 그리고 여러 번 쉬면서 올랐다. 이때즈음부터는 더 이상 걷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쉬고 싶고,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래도 아침엔 중간중간 바람도 불고 따가운 햇빛도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바람도 안 불기 시작하고 햇빛이 내리쬐어서 땀이 홍수처럼 뚝뚝 떨어진다. 6월이니 더위 걱정은 안 해도 될 줄 알았는데 너무 덥다. 계속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가 이내 오늘은 백운산까지만 가자는 생각을 하며 마지막 힘을 내며 걸었다. 백운산 정상에는 넓은 헬기장이 있어 야영하기에 딱 좋아 보였지만, 그늘이 하나도 없어서 너무 더운 탓에 정상에서 영취산 방면으로 1.5km정도 내려온 곳에서 텐트를 피칭했다. 그렇게 오늘은 3시 40분, 운행을 종료했다.
영취산 오르는-길, 유독 무겁게 느껴졌던-배낭
일시종주6일차 백운산~육십령
전날 피곤해서 일찍 자려고 했지만 자료조사를 한다고 검색하다가 7시가 넘어서야 잠에 들었다. 푹 자고 싶어서 일부로 알람을 맞추지 않았는데, 4시 반쯤 되니 저절로 눈이 떠진다. 알람 소리 대신 새소리와 함께 맞이하는 아침은 언제나 참 좋다. 푹 잤더니 개운하다. 아무래도 어제와 그제 민박집과 지인 집에 머물려 저녁에 늦게 잤더니 피로가 덜 풀렸던 것 같다.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춥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너무 추워서 한동안 침낭 속을 못 벗어나고 꾸물거리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하나씩 장비를 정리했다. 이틀 전 젖은 침낭을 말린다고 말렸는데 여전히 축축한 게 남아있다. 오늘도 아침부터 하루 종일 비가 온다는데 또 젖을 침낭과 텐트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걱정이다.
오전 6시, 길을 나선다. 오늘은 어제 못 다 간 육십령까지만 가면 되기에 부담감이 없다. 알고 보니 어제의 박지는 거의 백운산과 영취산의 중간 지점이었다. 길이 좋아 편하게 영취산 정상에 도달할 수 있었고, 이후 덕운봉을 거쳐 북바위에 도착했다. 북바위는 전망이 훌륭했다. 하루 종일 안개가 자욱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곰탕이었는데, 다행히 북바위에 도착했을 때 잠깐 안개가 걷혀준 덕분에 조금이나마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북바위에서 배낭을 벗고 경치 구경도 하고 사진을 찍으며 쉬다보니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점점 빗방울이 굵어져 우비를 꺼내 입었고, 이 때부터 우중 산행이 시작되었다. 조금이나마 말랐던 신발과 양말이 다시 축축 해지기 시작한다. 이틀 연속 젖은 채로 신고 다니다 보니 내 신발에서는 이제 지옥의 냄새가 난다. 그래도 더운 것보다는 추운 게 나은 것 같다.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힘들긴 하지만, 적어도 덥진 않으니 확실히 체력적으로 덜 힘들다.
육십령 전 마지막 봉우리인 깃대봉에 도착했다. 깃대봉은 구시봉이라고도 불리는데, 백두대간에는 유독 이름이 2개인 봉우리도 많고, 정상석이 2개인 봉우리도 많은 것 같다. 미국의 PCT처럼 백두대간도 한 단체에서 정비 및 관리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을 자주 한다. 백두대간도 매년마다 퍼밋 신청을 받으면 자연보호 차원에서도 좋고 백두대간을 잘 보존하며 우리도 길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깃대봉 정상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깃대봉 샘터에 도착한다. 오늘 식수를 보충할 곳으로 생각해 두었던 곳인데, 벤치도 있고 물도 잘 나온다. 깃대봉샘터에서 육십령휴게소로 향하면서 빨리 콜라가 먹고 싶다는 생각에 도착 1km 전부터 가민 시계를 보면서 “콜라 먹기 900M 전! 콜라 먹기 800M 전!”을 외쳤다. 콜라를 마신다는 것은 백두대간 최고의 선물이다.
우중산행 끝에 도착한 육십령 휴게소. 도착해서 들어가려는데 문이 안 열린다. 아.. 내 콜라. 오늘 비가 많이 와서 영업을 안 하시는건가 싶어 아쉬워하며 전화를 드려봤는데, 알고 보니 옆문이어서 문을 닫아두신 것이었다. 정문으로 들어오면 된다고 알려 주시는데 어찌나 기쁘던지! 사장님이 말씀하시길 사실 손님도 없고 해서 오늘은 일찍 문을 닫을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고 하신다. 조금만 늦었으면 정말 못 먹을 뻔 했다. 육십령휴게소에는 여러 카페 음료, 그리고 돈까스를 판매하고 있다. 식사 메뉴는 돈까스 하나인데, 이 육십령휴게소의 돈까스가 꽤 유명하다고 하다. 사실 나는 유명한지 몰랐는데 전날 지인 분이 육십령에 가면 돈까스 먹어 야된다고 알려주셔서 알았다. 그리고 돈까스는 너무 맛있었다. 감동의 맛이다. 너무 맛있기도 했고 또 배고파서 밥도 두 공기나 먹었다. 백두대간 구간마다 이렇게 휴게소나 식당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며칠 전에는 매일 콜라가 한 병씩만 떨어져주면 백두대간을 1년동안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거란 생각을 했는데, 며칠이 지나니 이제 조금 더 욕심을 부리게 된다. 점심을 먹으며 오늘 할미봉까지 갈지 말지에 대해 한참을 고민했다. 내일은 덕유산 구간을 지나야 하는데, 국립공원이라 야영을 하지 못 해 한 번에 돌파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하지만 거리가 꽤 길고, 길 자체도 쉽지 않다고 해서 걱정이 많다. 그래서 할미봉을 지나 삼자봉 바로 전까지는 덕유산국립공원 지역이 아니라는 것을 국립공원공단에 확인받았기에 삼자봉 근처에 가서 야영을 할까 싶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할미봉까지 길이 험하다는데 2-3시간 줄이자고 무리한 산행을 하지 말자는 결론을 내리고 결국 오늘은 육십령에서 야영을 하기로 한다.
깔고 자라고 주고 가신 사료봉투
육십령 휴게소 바로 앞에 큰 정자가 하나 있는데, 휴게소 사장님께서 비 오니 정자 밑에서 자라고 알려주신 덕분에 오늘은 비도 피할 겸 정자에 텐트를 피칭했다. 텐트에서 쉬고 있는데, 한 중년 부부께서 경치 구경하러 오셔서 인사를 드렸다가 짧은 대화를 했다. 그러다 시멘트 바닥에서 자면 입 돌아간다고 하시며 한참을 걱정을 해주신다. 연신 많이 자봐서 괜찮다고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걱정이 되시는지 결국은 이거라도 깔고 자라고 하시며 차 트렁크에서 사료 포대를 가져다 주셨다. 따뜻한 마음이 너무 감사했다.
누적100km 기념사진
오늘 드디어, 누적 거리 100km에 돌파했다. 내가 벌써 100km나 걸었다니! 이제 600km밖에 안 남았다. 생각보다 많이 느리게 가고 있긴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은 생각을 하며 여유를 가지려 하고 있다. 일기예보를 보니 내일 오전 9시까지 비가 온다고 한다. 가장 걱정되는 건 기상 특보로 입산 통제가 되는 것, 그리고 우중 산행의 위험이다. 산행 후기를 검색하는 것마다 할미봉 가는 길이 위험하다고 해서 잔뜩 긴장한 상태다. 괜히 섣불리 가는 건 아닐까? 길이 많이 험할까? 덕유산을 한 번에 통과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이 된다.
우중산행
7일차 육십령~삿갓골~황점마을
전날 쉽게 잠들지 못 했다. 빗소리와 바람소리가 큰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오늘 무사히 덕유산을 통과할 수 있을까 싶은 걱정 때문이었다. 지리산에서 이미 34Km가 쉽지 않다는 걸 절실히 느꼈고, 또 비가 하염없이 내려서 더더욱 걱정되었다. 오늘은 3시에 운행을 시작하려고 전날 8시쯤 잠들었는데, 빗소리와 바람소리가 너무 커 새벽 내내 잠을 설쳤다. 비가 어찌나 많이 오던지, 어제 산에 안 올라가고 정자 밑에서 자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잠을 설친 탓에 2시 반에 맞춰둔 알람을 못 듣고 정신 못 차리다가 3시 반이 되어서야 기상을 하고 빠르게 움직일 채비를 했다.
배낭 패킹을 하면서도 “오늘 갈까? 쉴까?”를 수없이 고민하다 그냥 가보자고 마음을 먹고 육십령 표시석 앞에 섰는데도 선뜻 마음이 안 내킨다. 비는 어느정도 줄어들어 빗방울이 거세진 않았지만, 바람이 어찌나 부는지 바람소리가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바람소리가 이렇게 무섭게 느껴지다니, 으시시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또 표시석 앞에서도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움직였다. 오전에 비 그친다고 했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이때까진 몰랐다. 비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걸.
육십령 들머리는 육십령 표시석 옆으로 있는 터널을 지나 바로 좌측으로 이어진다. 등산로 입구 팻말이 드문드문 잘 되어있어 어둠 속 에서도 금방 길을 찾을 수 있었고, 아스팔트길을 따라 조금 걷다보면 좌측으로 나무계단을 오르게 된다. 모든 후기에서 할미봉 오르는 길이 어렵다고 해서 긴장을 정말 많이 했는데, 초반에는 생각보다 길이 좋아 걷고 뛰고를 반복하며 기분 좋게 오를 수 있었다. 할미봉 정상에 다다를 때 즈음부터 본격적인 암릉 구간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로프 구간이 4-5번정도 등장한다. 산행을 하다 보니 “아, 여기가 그 블로그에서 수없이 봤던 위험구간들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너무 걱정을 많이 했던 탓인지 생각보다 안 어려워서, 허탈할 정도로 왜 그렇게 걱정을 많이 했나 싶었다. 어쩌면 암벽등반을 통해 바위와 조금은 친숙 해져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육십령에서 약 1시간 10분을 오르니 이내 할미봉에 도착했다. 할미봉까지 2시간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컨디션도 좋았고 길도 괜찮아서 금방 도착했다. 첫번째 관문을 무사히 넘었다는 생각에 어찌나 좋던지, 이제 남은 길도 무사히 갈 수 있을거란 희망찬 기분과 함께 곧바로 길을 이어갔다. 할미봉 이후로는 나무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게 된다. 이 구간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파른 암릉 구간이었던 것 같은데, 계단이 설치되면서 이제 위험요소가 사라진 듯 하다. 삼자봉에 도착하면 이 곳에서부터는 덕유산국립공원이 시작된다. 삼자봉에서 서봉 가는 길도 쉽지 않다고 하여 걱정되었는데, 실제로 나는 여기서부터 아주 지옥(?)의 남덕유산을 맛보게 된다. 삼자봉을 지나서부터 바람이 거세졌는데, 가면 갈수록 바람이 더욱 거세진다. 수풀 사이를 헤치고 걸어야 되는 탓에 또 신발과 양말이 축축해진지 오래고, 어느새 조금씩 비가 내려 옷도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어찌나 쎄던지,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삼자봉 이후부터 서봉까지 가는 길이 정말 힘들었다. 사실 체력적으로는 힘들지 않았는데, 문제는 바람이었다. 능선으로 올라오니 바람을 막아주는 수풀이 없어 내가 직격으로 바람을 맞아야 했는데, 정말이지 처음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특히 중간중간 바위 능선을 지나야 하는 구간에서는 아찔한 곡예산행이 계속 이어졌다. 박배낭을 메고 있어서 무게중심이 잘 안 잡혔고, 바람에 계속 휘청거리며 한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어려웠다. 평소에 딱히 두려움이나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 편인데, 등산을 하면서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이 날씨에 등산을 하는 게 가능한 것인가? 이러다 나 쥐도 새도 모르게 조난 당하는 건 아닌가? 온갖 걱정이 들었다. 바람에 휘청거리며 사족보행으로 바위를 붙잡고 지나기도 하고, 바람이 너무 쎄게 불 때면 나무를 한참동안 붙잡고 바람이 조금이나마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정말이지, 거의 기어가다시피 갔다. 서봉까지 가는 내내 계속 아찔한 산행이 이어졌고, 중간즈음부터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삿갓재에서 하산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서봉을 지나 철계단을 내려올 때에도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 계단을 양손으로 잡고 한 계단씩 한 계단씩 내려갔다. 내가 이렇게 겁을 먹는 모습은 나도 처음 봤기에 스스로도 웃기는 상황이었다. 바람이 이렇게 무서운 존재일 줄이야. 나는 여태 비만 신경 쓰면 되는 줄 알았다.
빗물으로 미끄러운 탓에 계속 넘어지며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옷
힘들게, 힘들게 남덕유산 정상에 도착했다. 비를 시나브로 맞았더니 어느새 몸도 배낭도 축축하다. 바람과 맞서 싸운다고 정신이 없었다가 문득 다 젖었다는 걸 인지하고 나니 어찌나 춥던지,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더 이상 옷도 없는데, 바람은 또 바람대로 계속 불고 있던 탓에 어떻게든 열을 올리려고 쉬지 않고 계속 열심히 움직였다. 축축한 바위와 낙엽이 가득한 길로 하도 넘어졌더니 오늘도 내 신발과 바지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너무 미끄러워 조심한다고 천천히 움직였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넘어지길 반복했다. 처음으로 엄마가 보고싶은 순간이었다. 어쨌든 삿갓재까지는 가야 하산을 할 수 있으니, 꿋꿋이 계속 걸어 결국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인 삿갓봉도 무사히 넘긴다.
삿갓봉에서 찍은 오늘의 처음이자 마지막 인증사진
오늘은 하루 종일 비바람과 싸운다고 사진을 거의 못 찍다시피 했는데, 그래도 삿갓봉까지 오니 마지막 봉우리라고 마음이 편해져 인증 사진도 찍고 여유를 부렸다. 삿갓봉에서 1Km 내려오면 삿갓재대피소에 도착할 수 있다. 사실 대피소에 도착하니 또 뭔가 아쉬워서 조금 더 가볼까 고민을 하기도 했는데, 이내 욕심 부리지 말자는 생각에 황점마을 방면 하산길로 간다. 대피소에서 황점마을까진 4.3Km로, 가파른 경사가 이어지는 탐방로다. 여기서 내려가면 접속거리가 왕복 9km가 생겨서 무조건 덕유산은 한 번에 돌파하고 싶었던 건데, 며칠째 날씨가 안 따라주니 야속할 따름이다. 하지만 날씨도 종주의 일부이니,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겠다. 물론, 그럼에도 날씨는 좋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삿갓골에서 황점까지의 길이 생각보다 엄청 가파르고 길어서, 내려가는 내내 내일 어떻게 올라오나 싶은 걱정이 들었다. 하산 길에도 미끄러워서 몇 번을 넘어졌는지 모르겠다. 비바람이 심해서 힘들었던 것도 있지만, 너무 미끄러운 길도 한 몫 했다. 아마 대간 종주뿐만 아니라 내 인생 통틀어 가장 많이 넘어진 날이 오늘 일 것 같다.
자욱한 안개
자욱한 안개

지도로 봤을 때 황점마을에 식당과 민박이 여러 곳 있는 것 같아 오늘은 식당에서 밥도 먹고 민박집 가서 편히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내려가보니 휑하다. 다행히 슈퍼는 영업 중이어서 슈퍼를 들렀다가 슈퍼 사장님께 여쭤보니 코로나로 인해 동네 상권이 다 죽었다고 한다. 탐방로 바로 앞에 있는 산나물집 식당도 코로나로 인해 장사를 안 한다고 하고, 민박집도 여러 곳 문을 닫았다고 하신다. 오늘 비를 너무 많이 맞아 따뜻한 샤워를 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해 민박을 할 생각이었는데, 주변에 갈 수 있는 민박집이 없어 결국 오늘도 야영을 하기로 한다. 어디서 텐트를 칠까 고민했는데 슈퍼 사장님께서 사람들이 차박을 많이 한다는 근처 주차장을 알려주셔서 그 곳으로 향했다. 주차장 바로 옆에는 화장실도 있어서 꽤 좋은 박지다.

부은 발

발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발바닥에 물집이 몇개 생겼는데, 물집은 그런대로 괜찮지만 발가락과 발바닥이 죄다 쓸려서 따갑다. 3일 연속 축축한 양말과 신발로 산행을 하다 보니 갈수록 발이 더 말썽을 부리고 있는데, 매일 오후 운행을 끝낸 뒤 양말을 벗으면 쭈글쭈글한 발을 만날 수 있다. 오늘은 쭈글쭈글한 발에서 정상적인 발로 돌아오기까지 5시간이 걸렸다. 양말은 계속 쓸려서 그런건지 양쪽 다 구멍이 나버렸다. 날씨라는 복병을 만나 생각보다 쉽지 않은 대간길이다. 내일은 다시 삿갓골로 올라가 빼재까지, 혹은 소사마을까지 가는 게 목표다. 내일은 제발, 제발 오늘보다 날씨가 좋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

Copyright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