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도쿄의 불빛

2021. 8. 2.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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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여자농구대표팀이 오늘(2일) 귀국했다. 한 번도 못 이겼고, 당연히 조별리그 탈락을 감수했지만 팬들은 선수단을 비난하지 않는다. 좋은 경기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경기의 수준이 팬들이 설정한 기준을 통과했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 여자농구대표팀에 ‘도쿄 8강’은 처음부터 목표가 아니었다. 1승조차 불가능한 과제였다. 더 냉정하게 말하면 2019년과 지난해 우리 여자농구의 실력은 올림픽에 나갈 수준이 아니었다. 기적과도 같은 두 차례 승리가 아니었다면 도쿄에 가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2019년 11월 14일 뉴질랜드에서 열린 지역예선에서 중국을 81:80으로 이겼다. 이 승리를 발판으로 최종예선으로 나아갔다. 2020년 2월 8일엔 세르비아에서 영국을 82-79로 이기는 또 한 번의 기적을 썼다. (2019년 유럽선수권대회 4위 영국은 ‘중국보다 더 까다로운 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우크라이나, 라트비아, 몬테네그로를 모두 이긴 강한 팀이었다.) 이 승리 덕분에 ‘최종전에서 중국에 져도 스페인이 영국을 이기면 조3위가 되어 본선에 나갈 수 있다.’는 복잡한 셈법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해서 가져온 본선 티켓의 가치를 따지기에 앞서 우리 농구는 선수혹사 논란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대한민국농구협회는 ‘지도력 부족’이나 ‘윤리적 결함’ 등이 아닌, ‘미디어와의 소통 부족’을 이유로 사령탑 교체를 단행했다. ‘재계약을 안 한다.’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해임이다. ‘미디어와의 소통 부족’이라니… 미디어의 공격이 무자비하기는 했다. 그래도 1907년 필립 질레트가 이 땅에 농구를 소개한 뒤 120년이 가깝도록 들어본 적 없는 희한한 해임 명분이었다. 속을 들여다보면 협회가 ‘본선 티켓을 따낸 감독의 공을 인정하며 미디어에서 주장하는 선수혹사 논란에는 절대 동의를 못하겠다. 그러나 고집을 부리며 우리를 괴롭히니 감독은 바꾸겠다.’고 응답한 것이다. 일종의 복화술(複話術)이다. 대표팀 감독 한 사람을 희생양 삼아 뭇매를 피하겠다는 이 비겁한 조치는 당시 협회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전주원 감독은 이 혼란을 뒤로 하고 취임했다. 우리 여자농구의 '맏딸'이라고 해야 할 전주원 감독이 넘겨받은 대표팀은 난파선이나 이미 무너진 것과 다름없는 초막 한 채에 불과했다. 나는 우리 여자농구대표팀 최초의 여성 감독이 이토록 가혹한 조건 속에서 출발하는 현실이 걱정스러웠다. 대체 무엇을 가지고 나가 경쟁할 것인가? 이러한 우려와 상투적인 의미 부여를 나무라듯, 전주원 감독과 우리 여자농구대표팀은 세 차례 올림픽 경기에서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세계 랭킹 3위 스페인(69-73)과 4위 캐나다(53-74)를 크게 위협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동메달 팀인 8위 세르비아(61-65)는 이길 뻔했다. 3전 3패나 A조 최하위라는 결과는 허물이 될 수 없다. 『아시아경제』의 이종길 기자가 정리했듯 여자대표팀은 ‘2012년 런던올림픽과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본선 진출 실패의 흐름을 끊었고, 더 발전할 가능성까지 확인했다.’

전주원 감독이 사이타마에서 1승을 전리품으로 챙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눈부셨던 후반에 조금만 더 힘이 받쳐 주었다면, 운이 따라 주었다면 그럴 수도 있었으리라. 박혜진(우리은행)과 윤예빈(삼성생명) 선수의 연속 3점슛으로 40-40을 만들고 42-42로 대치한 3쿼터 종반과, 윤예빈 선수가 코너 3점슛을 터뜨려 58-56으로 뒤집은 4쿼터 5분 16초부터 61-60으로 앞서나간 7분28초까지가 이날의 하이라이트였다. 그러나 세르비아는 남은 시간 동안 그들의 강함을 증명했다. 우리 골밑을 강하게 압박하고 리바운드를 잘 지켜냈다. 자유투를 얻을 때마다 꼬박꼬박 점수로 바꾸어냈다. 그들은 전체적인 경기 운영 능력과 승부 결정력에서 우리보다 나았다. 올해 유로바스켓 챔피언, AP통신이 미국에 이어 은메달을 딸 것으로 예상한 강팀다웠다. 박지수(KB)와 박지현(우리은행) 선수의 슛이 막판에 빗나가 아쉽지만 세르비아의 수비가 훌륭했던 결과다.

스포츠 경기는 대화(對話)와 같다. 정신과 육체를 비롯해 모든 차원에서 수많은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경기의 본질은 도전과 응전일지 모르지만 그 방식은 소통의 기술에 기초한다. 생경하겠으나, 나는 자주 ‘랑그와 파롤’이라는 언어학의 개념을 끌어다가 스포츠 경기를 이해하고자 노력해왔다. 랑그와 파롤은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가 주창한 개념이다. 랑그는 사회적이고 체계적인 측면을, 파롤은 개인적이고 발화적인 측면을 가리킨다. 랑그는 언어 체계를 의미하며 파롤은 그 체계 속의 언어 사용을 의미한다. 랑그는 문법처럼, 언어사용에 합의한 규칙들의 체계 전체를 지칭하므로 공적이며, 변하지 않는다. 반면 파롤은 말하는 사람의 어조나 환경, 맥락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일회적 발언이므로 사적이고 가변적이다. (김종우, 『구조주의와 그 이후』) 이를 농구 경기에 적용하면 랑그는 규칙과 규정과 기술, 파롤은 실제 경기다.

우리는 한국어를 사용한다. 즉, 우리말로 소통한다. 하지만 사람마다 말투가 다르다. 야구해설가 허구연 선생처럼 억양이나 발음이 남다른 경우도 있다. 은퇴한 투수 권혁 선수를 ‘궈낵’으로, 김현수 선수를 ‘기멘수’로, 변화구를 ‘베나구’로 불러도 우리는 쉽게 알아듣는다. 외국어도 다를 것 없다. 우리가 영어로 말하면서 ‘웍’이라고 발음하면, walk이나 work 둘 중 하나일 것이다. wok을 추가할 수도 있다. (‘아륀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화를 낼지 모르지만) 내 경험에 비춰보면 ‘걷는다’는 말인지 ‘일한다’는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인이나 영국인은 없었다. 맥락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대화할 때 문법을 말하지 않고 뜻을 전한다. 대화는 맞춤법이나 표준어 준수를 요구받는 세계가 아니다. 농구 경기도 마찬가지다. 선수들은 누가 경기규칙을 잘 지키는지, 패스를 교과서적으로 하는지를 겨루지 않는다.

농구경기는 때로 수학처럼 명료하지만 때로는 미학처럼 모호하다. 농구경기를 어느 정도 보면, 공을 어디로 보내고 누가 슛을 던져야 하며 누구를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길이 보인다. 고백하자면, 나는 젊은 기자 시절에 이 알량한 깨달음 때문에 적지 않게 실수를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낯이 뜨겁지만 당시에는 (코치나 선수가) ‘이 간단한 원리를 왜 모르나.’하고 답답해하거나 (특히 우리 대표팀이 국제경기를 할 때)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뻔한데 아무 생각없이 당했다.’며 분해 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이 모욕감을 느꼈음직하다. 사과하고 싶다. 이 주제넘은 깨달음과 지식 나부랭이는 이런저런 인연과 행운에 힘입어 ‘벤치 경험’을 해보고 나서야 꼬리를 내렸다. 문법의 세계와 회화의 세계가 다르듯이 경기는 지식의 영역에 갇힌 활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농구인 최영식 선생은 “코트에서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려보지 않고는 농구를 알 수 없다.”고 했을 것이다.

소쉬르의 말을 빌리자면 랑그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뇌 속에 자리 잡게 된” 집단적인 형태이며, 파롤은 “개인적이며 순간적인” “개별적 경우의 총합”이다.(김종우) 여기에서 인간의 독자성과 개성, 의지와 창의력이 작동할 공간이 발생한다. 나는 도쿄올림픽에 참가한 우리 여자농구대표팀의 경기에서 ‘flavor라고나 해야 할 독특한 매력을 느꼈다. 이 느낌에 이어 자연발생적으로 랑그와 파롤, 그리고 소통의 예술로서 농구를 이해하고자 하는 나의 오랜 노력이 결승점을 가까이 두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러한 예감의 한가운데서, ‘전주원의 농구라는 새 숙제를 받아들었음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전주원 감독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고등학생이었다. 힘과 기술을 겸비하고 창의력 넘치는 전주원 선수의 재능은 실업농구 현대산업개발에 입단한 뒤 꽃을 피웠다. 국가대표 가드 출신인 이문규(!) 선생이 그의 스승이다.


참된 뛰어남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생텍쥐페리, 『어린왕자』) 전주원 감독이 도쿄에서 펼쳐 보인 농구는 특별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세르비아와의 경기를 마무리하는 장면에서 한 텔레비전 해설자는 파울 작전을 제때 지시하지 않았다고 힐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대목에서 전 감독은 머릿속에서 이미 셈을 끝냈을 것이다. 내가 눈여겨보는 측면은 조금 다르다. 이번 대표팀의 특별한 면은 선수들의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확신과 의지였다. 전 감독은 박지현, 윤예빈 등 변수가 될 수 있는 선수들의 기능을 극대화했다. 국내리그 경기에서 클러치 상황일 때 슛이 정확한 편이 아니었던 윤예빈 선수는 두 번이나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올 수도 있었을 중요한 득점을 해냈다. 박지현 선수는 재능과 잠재력을 모두 발휘해서 도쿄에서의 마지막 밤을 하얗게 불살랐다. 그 결과가 스코어로 형상화됐다.

농구는 규칙과 규정의 스포츠가 아니다. 신장과 체중의 스포츠일 수만도 없다. 농구에는 인간의 신체적 능력을 초월하여 작용하는 특별한 영역이 숨어 있다. 이 영역을 무엇으로 설명할지 아직 모르겠다. 나는 항상 농구를 일컬어 ‘하늘을 날고 싶은 사람들의 꿈이 만들어낸 스포츠’라고 해왔다. 전주원 감독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우리 대표선수들을 이 불가지의 영역으로 인도하였다. 이 사실 만으로도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사족을 붙인다면, 또한 다시 랑그와 파롤을 끌어다가 설명한다면, 전주원 감독의 농구는 새로운 화법으로 말하는 개인의 출현을 알리는 것 같다. 남다른 말투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우리 선수들은 자신이 어떤 선수인지, 어떤 능력을 가진 선수인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농구를 했다. 잠재한 재능과 승리에의 열망을 폭발시키는 경기를 한 결과가 스코어에 반영됐다. 이러한 농구를 가능하게 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전주원 감독의 지도력이다. 훈련할 시간도 짧았고, 스승이기도 한 전임 감독이 불명예 퇴진한 대표팀을 맡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마술사가 아니라 정통 농구인으로서, 우리 농구사에 한 획을 그은 포인트 가드 출신의 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은 선수들의 잠재력을 모두 뽑아내는 일이었다. 전 감독은 그 일을 놀랄 만큼 능숙하게 해냈다.

또한 짚고 싶은 것은 우리 선수들의 플레이에서 보이는 자기 확신 내지 자신감이었다. 나는 그 근원을 외국인 선수 없이 국내선수로만 한 시즌을 치른 우리 리그의 힘이라고 보았다. 외국인 선수가 들어와 중심선수로 활약하는 WKBL의 리그는 우리 여자농구의 오랜 전통과 단절된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외국인 선수의 능력은 각 팀의 우열뿐 아니라 운명까지 결정한다. 감독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전략을 수립하고 경기를 운영하며 선수 자원을 배치한다. 국내 선수들 가운데 골밑을 맡는 선수들은 도태할 수밖에 없다. 박지수 선수처럼 특별한 신체조건을 타고났다면 모를까. 골밑은 물론 외곽에서도 득점하고, 때로는 가드 이상으로 뛰어난 드리블을 하는 외국인 선수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면 두드러질수록 국내 선수들이 활약할 공간과 시간은 삭감되었다. 국제무대에서 우리 대표팀이 보인 부진은 국내리그의 현실과 떼어 생각하기 어렵다. 국제무대에서 정상을 목표로 삼던 시절의 우리 여자농구는 특별했다. 세계의 많은 농구전문가들이 한국만의 경기방식을 주목했다. 나는 1984년 LA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딸 때의 선수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만의 경기방식, 파롤의 부재가 국제대회에서의 성적은 물론이고 국내농구의 황폐화(예를 들면 직업으로서 농구를 선택하려는 미래자원의 격감, 주요 선수들의 고령화와 젊은 선수들의 성장 지체)를 야기했다고 보는 편이다.

나는 도쿄올림픽에서 우리 여자농구의 향기가 어렴풋이나마 되살아남을 느꼈다. 빠르고 과감하며 도전적인 농구,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혼의 농구. 아련한 기억으로 사라져가는 듯하던 한국 여자농구 내면의 불꽃이 불현듯 우리 앞에서 번득인 것이다. 그 불꽃을 선명히 되살린다면, 우리는 다시 싸워볼 수 있다. 지금 우리 대표팀의 구성은 박찬숙-김화순-성정아-최경희의 시대(1984년 LA올림픽)나 정은순-유영주-전주원-정선민의 시대(2000년 시드니올림픽)보다 못하지 않다. 국가대표팀은 여전히 그 나라 농구의 역량을 보여주며 수치가 아니라 정신과 영혼의 영역에서 가능성의 크기를 정한다. 전주원 감독과 우리 대표팀이 도쿄에서 얻은 전리품은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가 아니라 미래다.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며, 그 가능성에 얼마만큼 값을 매기느냐에 따라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 가능성을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 옮기는 일이 여자농구 전체의 과제이자 책임으로 남았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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