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우의미·중관계사] 청일전쟁과 중국의 미국 SOS

- 2021. 8. 1.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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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지도자만 달랐어도 나라의 국운과 세계사의 판도가 바뀌었을 상상을 하게 된다.

이 전쟁에 미국이 개입했으면 한·중·일과 동아시아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1894년 12월 23일, 청일전쟁이 발발한 지 근 반년 만에 해리슨 정부의 국무장관 존 포스터는 청나라 광서제의 전보를 받았다.

만약 미국이 전쟁에 개입했으면 한·중·일의 국운뿐만 아니라 동아시아가 아마도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지 않았을까를 상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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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지도자만 달랐어도 나라의 국운과 세계사의 판도가 바뀌었을 상상을 하게 된다. 청일전쟁(1894)도 예외가 아니다. 이 전쟁에 미국이 개입했으면 한·중·일과 동아시아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1894년 7월에 청일전쟁이 발생하기 전부터 전쟁의 기운은 워싱턴에서도 일찍이 돌았다. 동아시아에서는 현실로 다가왔다. 그 결과 미 해병대는 6월에 우리나라 제물포에 당도했고 서울까지 진입했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 이들은 북경으로 회귀했다.
만약 ‘엄격한 중립’을 고수했던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대통령(1893∼97)이 아니었고 그의 전임(벤저민 해리슨)이 재직했으면 상황은 달라졌을 법하다. 해리슨은 확장주의자이고 전쟁을 피하지 않았다. 반면 클리블랜드는 정직과 도덕을 외교 철학으로 삼았다. 그의 외교정책은 ‘양심, 정의, 평화와 중립’에 기반했다. 따라서 비겁하게 싸워 이기는 것보다 정직한 원칙을 위해 싸우다 지는 것이 더 가치가 있었다.
벤저민 해리슨(왼쪽부터), 존 포스터, 그로버 클리블랜드 출처:위키피디아
1894년 12월 23일, 청일전쟁이 발발한 지 근 반년 만에 해리슨 정부의 국무장관 존 포스터는 청나라 광서제의 전보를 받았다. 요점은 일본과의 정전협상 중재를 요청한 것이다. 일본이 무조건의 정전을 거부하고 과도한 요구를 한 탓에 청나라는 외세의 중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에 호응한 그는 이듬해 1월 중국에 도착, 3월에 흠차대신 이홍장과 일본으로 향했다.

포스터의 역할은 결과적으로 하나였다. ‘무조건적인 정전’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홍장이 숙소로 복귀하던 길에 일본 저격수의 총에 맞아 얼굴에 총알이 박힌 부상을 입은 결과가 대신했다. 그 결과 청은 정전이라는 명분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챙겼지만 일본에 많은 영토를 할양했다. 청 조정에 보고를 꺼린 이홍장 대신 포스터가 이를 대신했다. 청은 포스터에게 국무위 고문직 수락을 간청했으나 손자와의 낚시 약속에 거절됐다. 그 손자가 훗날 존 덜러스 국무장관이다. 만약 미국이 전쟁에 개입했으면 한·중·일의 국운뿐만 아니라 동아시아가 아마도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지 않았을까를 상상하게 된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 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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