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종일칼럼] 혁명과 롤렉스 시계

- 2021. 8. 1.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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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전직 공직자 명품 시계 자랑
北 지도층 고가 외래품 즐기면서
주민들엔 반동·퇴폐 문화로 배격
사회주의 체제의 불안정성 반증

“이 시계가 만불짜리입니다.” 탈북한 전직 고위 공직자 한 분이 팔을 치켜들어 팔목에 찬 시계를 보여준다. 북한에서 최고 권력자가 마음에 드는 측근에게 상으로 준다는 시계를 가까이서 처음 본다. 본인도 이 시계가 그렇게 비싼 것인지는 외부 세계에 나와서 처음 알았다고 한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남는다. 단순히 가격이 고가인 것 때문만은 아니다. 이 시계 하나가 북한 일반 주민의 생활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만도 아니다. 어째서 사회주의 혁명에 기여한 공적에 대한 상이 고가의 자본주의 상품이어야 하는가.

1970년대 말 그때로는 드물게 구소련에 갈 기회가 있었다. 소련 정부가 국제적인 학회를 모스크바에 유치하는 조건으로 이 학회에 논문을 발표하는 학자에게는 입국을 허가하기로 합의가 이뤄졌었다. 도쿄에 있는 소련 영사관에 신청을 한 후 6개월 만에 비자를 받았다. 비자를 받기 전에 소련 체류 중 쓸 비용을 선납해야 하는 이상한 경험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남한 학자의 소련 방문 문제를 둘러싸고 북한 측이 소련 정부에 크게 항의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현지에서 북한 관리에게 여러 가지로 괴롭힘을 당한 기억도 있다. 이제는 혹 해외에서 북한 동포를 만나서 이야기라도 붙여보려 하면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피해 버린다.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
어떻든 간에 어렵게 얻은 기회였기에 학회 참가 후 1개월여 이곳저곳 다니면서 여러 층의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여러 가지를 보고 느끼는 것이 많았지만 그중 한 가지가 특히 인상에 남았다. 불가코프의 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연상시키는 현지인의 외래품에 대한 요구였다. 예를 들어 추잉 껌이나 여자용 스타킹 아니면 청바지 나부랭이 등 별 신통치도 않은 소비품이 왜 현지인에게 큰 관심을 끄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때의 경험을 근거로 귀국 후 쓴 보고서에서 소련 체제가 10년 안에 큰 개혁을 하든지 아니면 붕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언급을 했다.

그 붕괴가 현실이 된 후 그때의 경험을 상기하면서 논문 한 편을 학회에서 발표한 일이 있었다. 논문은 간단한 가설에 기초한 것이었다. 즉, 어떤 체제도 정치·경제·문화의 세 가지 축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체제와 공적인 담론에 맞는 문화를 창조하는 데 실패했다.

중요한 것은 빈곤이나 사치 그 자체가 아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예수가 이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말을 온 세계에 전하라고 했다. 이때 이르신 말씀이 있다. “집을 떠나 먼 길에 나서면서 옷을 두 벌도 마련하지 말라. 입은 옷 그대로 신은 한 켤레뿐, 돈도 음식도 챙기지 말라. 날이 저물면 어떤 집에든 가서 하루 저녁 신세를 청하라. 받아들여지면 감사를 하고 거절당하면 신발에 먼지를 털어버리고 나와라.” 훌륭한 말씀이었다.

소비품에 마음을 쓰기 시작하면 신앙과 구원의 메시지와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로마에 도착해 본 것은 엄청난 소비 수준과 사치였다. 만약 사도들이 이 소비 문화를 부럽게 생각했다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없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들은 로마의 높은 물질문명과 소비를 부러워하기는커녕 여기에서 퇴폐와 죄악을 본 것이었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이 그리스에 관해 깊은 감명을 받은 일이 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올림픽 경기였다. 엄청난 노력과 경쟁 끝에 차지한 우승의 영예를 얻으면 그에 대한 보상이 월계수 가지로 엮은 관 하나였다.

북한 정권은 최근 문화 투쟁 중이라고 한다. 북한은 “사회주의 생활양식에 배치되는 사소한 싹도 철저히 짓뭉개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못하면 체제가 ‘물 먹은 담벼락처럼’ 하루아침에 붕괴된다는 말까지 들린다. 그런데 지도층의 롤렉스 시계나 명품 핸드백, 벤츠 자동차, 그리고 호화 요트 등은 무엇인가? 문화란 노래나 춤 혹은 문학 작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지도층이 즐기며 자랑하는 고가의 외래 소비품이 바로 이들이 배격해야 하는 반동 사상과 문화의 산물이며 표현이고 ‘퇴폐 문화’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의 지적대로 금지란 욕망의 다른 면인가? 일반인에게는 금기인 물품이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우월성을 시현한다는 것인가? 생각은 여기서 멈춘다.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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