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없는 자본주의' [김학균의 금융의 속살]

김학균 |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2021. 8. 1.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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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전 세계에서 시가총액이 가장 큰 기업은 애플이다. 올해 7월29일 기준 애플의 시가총액은 2조4000억달러에 달한다. 한국 코스피 시장 전체 시가총액 1조9억달러보다 훨씬 큰 규모이니 애플은 세계 증시 역사상 전례를 찾기 힘든 공룡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애플 주가는 지난 1년 동안 98%나 급등했다. 주가가 크게 오르면 기업이 벌어들인 순이익이나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 대비 주가 수준을 가늠하는 밸류에이션도 상승하기 마련이다. 애플의 PER(주가순이익 비율)은 26.3배이고, PBR(주가순자산비율)은 37.1배에 달한다.

통상 PBR이 PER보다 높은 경우는 흔치 않다. 삼성전자의 경우 7월29일 기준 PER은 12.5배, PBR은 1.7배이다. PER은 주가(시가총액)를 1년 동안 벌어들인 당기순이익으로 나눈 값이고, PBR은 주가를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자기자본으로 나눈 값이다. 당기순이익은 1년 동안 이뤄진 기업활동의 성과를 나타내는 지표인 반면, 자기자본은 장기간의 기업활동이 누적적으로 반영된 지표이다. 그래서 업력이 아주 짧은 스타트업이 아니라면 대체로 자기자본이 당기순이익보다 훨씬 크고, PER이 PBR보다 높은 경우가 일반적이다.

애플은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최근 3년 동안 벌어들인 당기순이익만 1721억달러에 달하고 있다. 그렇지만 지난 3년 동안 애플의 자기자본은 1340억달러에서 653억달러로 51%나 줄어들었다. 애플의 PBR이 PER보다 훨씬 높은 이유가 여기 있다. 벌어들인 이익이 기업에 쌓이면서 자기자본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자본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재무적 상식에 반하는 일이다. 통상 자기자본이 줄어드는 기업은 적자가 쌓이는 부실기업인 경우가 많다. 손실을 내면서 과거에 벌어 놓은 이익을 까먹는 경우 자기자본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애플과 같은 초우량 기업이 여기 해당될 일은 없다.

애플은 벌어들인 이익보다 훨씬 큰 규모의 자금을 사외로 유출시키고 있다. 최종적으로 주주에게 귀속되는 몫인 당기순이익이 사외로 유출되는 경로는 두 가지이다. 투자 또는 배당과 자사주매입과 같은 주주환원이 그것들이다. 애플은 극단적인 주주환원 정책을 펴면서 자기자본을 줄였다. 최근 3년 동안 애플은 자사주 매입 2096억달러, 현금배당 419억달러 등 총 2515억달러를 주주환원에 사용했다. 같은 기간 동안의 당기순이익 1721억달러보다 훨씬 큰 규모의 돈을 주주들에게 돌려준 셈이다. 반면 설비투자 금액은 311억달러에 불과했다.

애플의 자기자본 감소는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본 없는 자본주의’이다. 자본에 대한 전통적 시각은 자본은 무한팽창의 자기증식을 속성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자본의 팽창이 한계생산을 체감시킨다고 봤고, 마르크스도 비슷한 맥락에서 자본의 집적에 따른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공황을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미국의 주요 기업들은 오히려 자본을 파괴하고 있다. 애플은 그나마 자기자본이 플러스 값이지만, 미국의 대표 우량기업 30개로 구성된 다우지수에 속하는 기업들 중 보잉과 맥도널드는 아예 자기자본이 마이너스 값이다. 부실기업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전액 자본잠식이 미국을 대표하는 우량기업들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자본 없는 자본주의’의 도래는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무형자산이 가지는 중요성의 증대이다. 요즘은 기업활동의 경우 브랜드나 데이터, 네트워크 등과 같은 무형자산이 가지는 중요성이 커지는데, 현행 회계기준은 이런 개념을 제대로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 대체로 화폐가치로 측정 가능한 유형자산 중심의 회계 처리가 주류이다 보니 기업이 가진 중요한 자산들이 재무제표에 누락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액 자본잠식 기업인 맥도널드를 부실기업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40년 연속 흑자기업인 맥도널드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자산이 회계적으로 표현되지 못하고 있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두 번째는 과도한 주주환원이다. 보잉은 당기순이익을 전액 사용하는 것은 물론 부채까지 끌어오면서 자사주를 매입하다가, 지난해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국면에서 부도 위기에 내몰린 바 있다. 자기자본은 경제 위기를 넘기는 완충기제로 사용될 수 있는데, 기업에 쌓아 놓은 자산이 없다보니 일거에 어려움에 처했다.

아무튼 자본을 줄임으로써 자본 효율성은 높아지고, 주주들에게 관대한 정도를 넘어서는 과도한 주주환원이 이뤄지고 있다. 반면 대규모의 좋은 일자리를 창출했던 유형자산에 대한 투자는 위축되고 있다. 자본의 인적 표현인 주주에게 유리한 환경이다. 어떤 식으로든 투자하고 살아야 할 세상이다.

(‘자본 없는 자본주의’는 조너선 해스컬의 <Capitalism without capital>의 국내 번역서 이름에서 차용했음을 밝힙니다.)

김학균 |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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