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으로 쓰는 복분자는 '안 익어야' 대접받는다 [알아두면 쓸모 있는 한의과학]

정환석 | 한국한의학연구원 책임연구원 2021. 8. 1.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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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산딸기가 익어가는 여름이다. 캠핑을 좋아하는 필자는 캠핑장 근처에 있는 식물들을 관찰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을 좋아한다. 얼마 전 캠핑장 주변에 산딸기가 있어서 네 살 딸에게 따서 주니 제법 잘 먹고, 또 따러 가자고 조르기에 흐뭇했다.

산딸기를 복분자 딸기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블랙 라즈베리’라고 불리는 복분자 딸기는 완전히 익으면 까맣게 변하는 특징이 있다. 복분자는 한의학에서는 정기를 단단하게 하는 ‘고정(固精)’, 생식기능을 포함한 신장의 역할을 돕는 ‘익신(益腎)’, 요실금과 잔뇨감을 없애주는 ‘축뇨(縮尿)’의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름 그대로 ‘요강을 뒤집는 열매’라 해서 정력에 좋은 식품으로 인식돼 왔으며 술이나 음료 등 다양한 상품으로 판매되고 있다. 대부분의 복분자 관련 상품은 익은 복분자 딸기를 원료로 사용해서 검은색을 띠며 달고 신맛이 난다.

하지만 한의학에서 사용하는 복분자는 다르다. 익지 않은 복분자 딸기 열매를 쓴다. 앞서 언급한 한의학에서의 ‘고정’이나 ‘익신’은 정력과 관련된 효능이며, 흥미롭게도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논문도 있다. 복분자는 한약뿐만 아니라 건강기능성 식품 원료로도 사용되는데, 간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있고, 혈중 콜레스테롤을 개선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또한 익지 않은 복분자 딸기 열매를 사용한다.

열매는 익어야 제맛인데 왜 익지 않은 열매를 사용하는 걸까. 흥미롭게도 안 익은 복분자는 익은 복분자보다 약 7배의 ‘엘라그산(ellagic acid)’을 함유하고 있다. 엘라그산은 항암 및 항산화 효능으로 잘 알려진 성분이다. 복분자가 익기 전후로 맛이나 색이 확연히 다른 것을 보면 엘라그산 이외에도 많은 성분 차이가 있을 것이고, 효능도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필자는 수년 동안 한약을 이용한 종양면역 치료제를 연구해왔다. 암세포를 직접 죽이는 세포독성 항암제가 아니라 한약으로 면역세포를 강화해 암세포를 공격하는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1000여종의 천연물을 무작위로 탐색한 결과 흥미롭게도 복분자에서 효능을 발견했다. 복분자는 면역관문 분자를 차단하고, 이를 통해 암세포가 면역세포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게 만들어 항암 효능을 보였다. 종양을 이식한 동물 모델에서도 복분자의 우수한 종양 억제 효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필자 연구팀은 식약처에서 복분자를 이용한 종양면역 치료제 2상 임상시험 계획을 승인받아 관련 절차를 준비하고 있다. 보잘것없는 안 익은 복분자 딸기가 면역세포를 강화해 무시무시한 암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주목나무 껍질에서 항암제 ‘택솔’이, 버드나무의 살리실산을 바탕으로 ‘아스피린’이 나왔으며, 쑥으로는 위염 치료제 ‘스티렌’이 개발된 것처럼 주변에 흔한 소재가 훌륭한 약이 된 사례는 매우 많다.

주변에서 암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하루빨리 약으로 개발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은 조급한 마음이 들지만, 엄격한 임상시험을 통한 효능과 부작용에 대한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 아직 복분자의 항암 효능에 대한 연구는 전임상 단계에서만 수행됐으며, 임상연구에서 밝혀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어 일반인들이 오·남용하지 않길 바란다. 향후 연구·개발에 매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환석 | 한국한의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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