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조의 난(難)

한겨레 2021. 8. 1.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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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우석진 ㅣ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지난 7월13일 더불어민주당은 재난지원금을 기획재정부가 제시한 소득 하위 80%가 아닌 전국민을 대상으로 지급하기로 결의했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비공개 최고위원회의를 열어 “재난지원금은 전국민 지원금으로 하는 것으로 지도부가 결정했다”며 사실상 당론으로 결정해 정부와 협의에 나섰다. 바로 전에는 송영길 대표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와 전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지원하기로 합의하기도 했었다.

정부의 제2차 추경안은 선별적 재난지원금, 소상공인에 대한 피해지원, 신용카드 사용에 대한 캐시백과 채무상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정 사이에 소상공인 지원 확대에는 이견이 없었다. 델타 변이의 확산으로 소상공인의 피해가 커지고 있어 신속한 지원 확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정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던 지점은 재난지원금 지급 범위, 신용카드 캐시백 정책 시행 여부 등이었다.

여당은 “전국민 지원”의 깃발을 들고 정부와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여당과 정부의 협의 결과는 홍남기 부총리의 대승이었다. 추경을 승패로 묘사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거대 여당의 힘을 보여줄 것 같았던 민주당이었지만 협상 결과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홍 부총리는 재정을 수호한 관료가 되었다.

추경 총액은 정부안 대비 1.9조 증액은 되었지만 여당의 결의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국민지원금’으로 이름을 바꾼 재난지원금은 여전히 하위 80%를 대상으로 하였다. 다만, 맞벌이와 1인가구 선정기준을 완화하겠다고 수정하였고, 그러고서는 88%로 지원 가구를 확대했다고 발표했다. 효과가 불분명해 보이는 신용카드 캐시백 제도는 감액은 되었지만 그대로 살아남았다. 2조원의 국가채무 상환도 계획대로 하기로 했다. 추경을 하면서도 국가채무를 상환하는 이상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도대체 왜 슈퍼여당이 홍남기 부총리에게 꼼짝 못했던 것일까? 일단 청와대를 포함한 주요 정책 라인을 기획재정부 출신 관료들이 차지하고 있다. 홍 부총리는 자리를 걸었고, 여당은 아무것도 걸지 않았다. 오히려 경선 중이라 전국민 지원은 이재명 경기도지사에게 유리할지도 모른다는 견제심리가 내심 중요했던 것 같다. 재정을 수호하겠다고 배수의 진을 친 홍 부총리를 설득하기에는 여당은 구호 외에는 별 준비를 하지 않은 것 같다.

홍 부총리가 이렇게 세게 나올 수 있었던 데는 헌법적 근거가 있다. 헌법 제54조는 예산 편성과 관련된 권한을 규정하고 있다. 예산 편성은 정부가 하고 국회는 그 예산안을 심의·확정하도록 되어 있다. 제56조에는 정부가 예산에 변경을 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하여 국회에 제출할 수 있는 권한을 기술하고 있다.

문제는 제57조이다. 57조는 국회가 예산안을 심의할 때 “정부의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부를 대표하는 기획재정부 홍 부총리가 동의를 해주지 않는 한 감액하는 것 외에는 국회가 특정 항목을 증액할 수 없는 것이다. 재난 시기에 시행하는 추경을 감액할 것이 아닌 다음에야 국회가 권한을 행사할 여지가 없다.

이 조항은 정치인들에게 예산을 변경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을 때 자칫하면 재정 포퓰리즘으로 흐를 가능성에 대해 입법자들이 우려한 결과일 것이다. 표를 의식해야만 하는 국회의원들이 담합하여 특정 비목을 신설하거나 증액하려고 하는 유인을 행정부가 견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정부도 국회의 민의를 고려하여 일정 정도 수정을 해주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와 같이 정부와 집권 여당이 극한으로 대립하는 경우에는 직업공무원이 선출된 국회의원의 의견을 막아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야말로 헌법 57조의 힘을 경험하는 기회가 된 것이다. 문제 많은 추경안을 고수한 홍 부총리와 이의 근거가 된 헌법 57조를 보고 있으면, 다음 개헌 때 예산 편성권을 미국처럼 국회로 넘기거나 일정 한도 내에서 예산안을 수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조정하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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