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현대사 현장 온몸으로 겪어낸 '시대의 변호사' 잠들다

한겨레 2021. 8. 1.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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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고 강신옥 변호사 영전에
고 강신옥 변호사가 2015년 12월 이철·유인태 등 민청학련 사건 피해자들이 서울 동대문의 동화반점에서 마련한 팔순 축하모임에서 기뻐하고 있다. 민청학련계승사업회 제공

1960년대말 ‘통혁당’ 등 인권변호의 원조
74년 민청학련 변론때 초유의 ‘법정 구속’
‘항소·상고 이유서’ 국제 법학계도 인정
‘10·26’ 김재규 국선변호…재심운동 진력
국회의원 시절 지역구보다 도서관 ‘열공’

“유품에서 ‘회고 기록’ 나오길 기대하며”

지난 7월 31일 별세한 강신옥 변호사는 인권변호사란 말이 우리 사회에 쓰이기 전부터 시국·공안사건에 남달리 관심을 갖고 피고인들을 격려하며 방어해준 분이다. 호탕하고 소탈한 성품에 후배들과의 교류에 격의가 없었다.

내가 고인을 처음 뵌 것은 1970년대 초반 서소문 시절의 서울지방법원 법정에서였다. 신금호 등 대학 출신 노동운동가들의 재판에서 열정적으로 변호를 해주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앞서 신영복 등 1960년대말 통혁당 사건 피고들의 변론을 맡았고 도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초를 겪었던 최상용, 김영작도 그의 신세를 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체로 지연, 학연을 통해 개별적으로 사건을 맡았던 그가 인권변호사로 강력한 발자취를 남긴 것은 1974년 4월의 민청학련 사건이 계기가 됐다. 시위를 하면 최고 사형까지 처한다는 긴급조처를 남발했던 유신정권의 서슬 퍼렇던 기세에 재야 법조인들도 움찔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변호인을 마련하려는 필사적 노력이 여러 갈래로 진행됐다. 사건의 ‘2대 주범’으로 몰렸던 이철·유인태의 고교 동창 이우근이 마침 황인철 변호사 사무실에서 변호사 실무수습을 하고 있었다. 30대 중반의 황 변호사는 통사정하는 이우근의 호소를 뿌리치지 못하고 홍성우 변호사와 의기투합해 무료변론에 나섰다.

강 변호사는 다른 경로로 사건을 맡았다. 고 채현국 선생의 부친이 운영하던 흥국탄광을 기반으로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던 이선휘·박윤배가 “김지하 죽는 꼴은 절대 볼 수 없다”며 강 변호사에게 매달렸다. 그는 김지하 외에도 고교 후배 여정남, 기독학생총연맹의 관련자까지 변호를 맡았다. 이것이 ‘1세대 인권변호사’의 진용이 갖춰지는 시발점이 됐다.

삼각지의 국방부 청사 안에 마련된 법정에서 공판 도중 변호사를 중앙정보부가 연행해가는 전대미문의 만행은 그해 7월9일 민청학련 1차 기소자의 결심공판 때 일어났다. 검찰관이 사형, 무기징역, 20년형 등을 태연하게 구형하자 강 변호사는 작심한 듯 “직업상 이 자리에서 변호하고 있으나 차라리 피고인들과 뜻을 같이하여 피고인석에 앉고 싶은 심정”이라고 단호한 어조로 변론을 이어갔다. 며칠 뒤 그는 긴조 위반과 ‘법정모독죄’ 등으로 구속 기소돼 군사법정에서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의 형을 받았고, 이듬해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그때 강 변호사의 항소·상고 이유서는 국내에서는 공개적으로 논의되기 힘들었으나 외국의 법학계에서는 법리적으로나 내용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유서에는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저명한 법률가들의 논리나 일화가 많이 담겨 있다. 훗날 강 변호사에게 ‘남산’에서 가혹행위를 당하지는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한창 조사를 받고 있는데 6국 국장이 들어와 정중하게 모시라고 했다고 하더라, 어이가 없어 조금 전에 당신 부하인 ‘윤 계장’에게 각목으로 폭행을 당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항변했다”고 말했다. 긴급조치 위반 관련 중 유일하게 ‘장기 미제’로 남아있던 그의 사건은 6월 대항쟁으로 세상의 흐름이 바뀐 뒤에야 1988년 3월 최종적으로 무죄가 선고됐다.

1980년 김재규(맨왼쪽 뒷모습) 항소심 법정에서 고 강신옥(오른쪽) 변호사가 고 황인철(왼쪽), 안동일(가운데) 변호사와 함께 변론을 하던 모습이다. 사진 김영사 제공

고인은 1979년 10·26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의 변호를 맡아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원래는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의 변호를 담당했다가 재판부의 요청으로 안동일 변호사 등과 함께 김재규의 국선변호인도 떠맡게 됐다. 그때부터 남한산성에 수감된 김재규를 수시로 찾아가 면회한 그는 김재규의 ‘거사’에 진정성이 있다고 보고 구명과 재심운동에 진력했다.

그는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이 이끄는 통일민주당에 입당해 서울 마포에서 당선됐다. 정치부 기자 시절 국회에서 취재하다가 시간이 나면 의원회관의 사무실로 찾아가곤 했는데 그는 거의 자리에 없었다. 비서들에게 물어보면 국회도서관에 있다고 했다. 의원열람실에 틀어박혀 유권자들의 경조사에도 거의 다니지 않았으니 지역에서 평판이 좋을 리 없었다. 14대 총선에서는 지역구 공천을 받지 못하고 전국구로 밀려났고 ‘정치 외도’는 흐지부지 끝났다.

고인은 한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력이 나빠졌지만 책을 잡는 습관은 평생 거두지 않았다. 국회도서관 사서들에게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금 뱃지’를 뗀 뒤에도 가장 열심히 의원열람실을 찾은 사람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의원 시절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진상규명 소위’를 맡는 등 현대사의 주요 현장에 서 있었던 그에게 나는 회고록을 꼭 남기시라고 여러 차례 권유했지만, 그때마다 “에이, 무슨…”이라며 말을 막곤 했다. 유족들이 그의 서재를 정리할 때 삶을 회고하는 원고가 ‘불쑥 기적처럼’ 나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김효순/전 <한겨레>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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