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쇠붙이인 줄 알았다..씻어보니 한글, '흥분이 시작됐다' [공평동 유적 현장을 가다]
[경향신문]
“슬슬 내려가 보죠.” 지난달 20일 오후 오경택 수도문물연구원 원장을 따라 서울 종로구 공평동 유적 발굴장 철제 대문에서 공사 차량이 오가는 길을 내려갔다. 오 원장이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중 나 지역 동쪽 끝을 가리키며 “저곳”이라고 말한다. ‘ㅭ’, ‘ㆆ’, ‘ㅸ’ 등 조선시대 동국정운식 표기가 쓰인 한글 금속활자 등 여러 문화재를 발견(▶기사보기 : 훈민정음 시기 한글 금속활자 발굴)한 곳이다. 종로 2가 교차로의 서북쪽 모퉁이 건물 뒤편, 지표면에서 3m가량 내려간 지점이다.
■그저 쇠붙이인 줄 알았다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수도문물연구원은 2020년 3월9일 발굴 조사에 들어갔다. 1년3개월이 흐른 지난 6월1일 발굴단원이 쇠붙이 하나를 찾았다. 연구원들이 그 소식을 듣고 확인하니 총통이었다. 조사 결과 밝혀낸 건 승자총통(1583년) 1점, 소승자총통(1588년) 7점이다. 보고를 받고 다음 날 오 원장이 현장에 갔다. 다른 쇠붙이들도 발견했다. 포탄을 엎어놓은 형태의 동종의 파편, 두 마리 용 형상을 한 용뉴(용 모양 손잡이)를 캐냈다. 별자리를 이용해 시간을 가늠한 일성정시의, 자동 물시계의 부품인 주전으로 보이는 동판도 찾았다.
“건물 고막이(벽체의 기초) 옆에서 쇠붙이들이 나왔죠. 총통하고 일성정시의를 수습했더니 항아리 편이 하나 뚝 떨어지는 거에요. 항아리가 토압(土壓)으로 깨졌던 거죠.”
공평동, 청진동 일대 유적에서 항아리는 곧잘 나온다. “항아리를 한 스무 개 출토하면 한 개 정도만 뭐가 들어 있죠.” 이 항아리들과 성격은 다르지만, 공평 1·2·4지구의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쪽에서도 진단구를 여러 점 발굴했다. 건물을 지을 때 안전과 번영을 기원하려 묻는 항아리다. 별다른 내용물을 확인한 적은 없다. “항아리에서 공깃돌 같은 게 한 두 개 떨어져서 현장에서 바로 씻어 보니 금속 활자였어요. 항아리를 싸서 바로 연구원으로 가서 분류 작업을 했죠.”
오 원장은 ‘쇠붙이들’이 처음 나왔을 때 크게 중요한 유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세척한 쇠붙이에서 한글이 드러난 걸 보곤, 흥분이 시작됐다. 활자 전문가들을 불러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정조 시기 사회가 발달하고, 문화 저변 확대 같은 게 일어나다 보니, 조선 후기 금속활자는 남은 게 수십만 점 정도 돼요. 그런데 조선 전기 금속 활자가 거의 없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세조 즉위년인 1455년 주조한 ‘을해자’가 30점 정도 있죠. 이 항아리 하나에서 대여섯 종류 활자 1600여 점이 나온 거예요. 전문가들도 ‘못 보던 게 나왔다. 을해자, 갑인자일 수도 있다. 이건 국보급이다. 활자 연구를 다시 해야 할 정도’라며 격앙됐어요.” 동국정운식 표기는 인쇄물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세종 때 4개만 만든 일성정시의도 문헌에만 나온다.
■재개발은? 유물은 어디로?
청진동 르메이에르 빌딩 재개발을 할 때부터 서울 도성 발굴이 시작됐다. 누군가 석재를 옮겨 나가는 걸 보고 “문화재가 반출되고 있다”고 관청에 신고했다. 실제 파보니 문화재가 나왔다. 이후 서울 도성 안에서 빌딩을 지을 때는 문화재 조사를 하도록 했다.
공평 1·2·4지구는 2010년 문화재 지표조사, 2014~15년 매장문화재 발굴조사를 거쳐 만들었다. 유적 일부만을 떼어내 신축 건물에 옮겨 전시하는 게 아니라 유적을 그 자리에 전면 보존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 결과물이 지금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다. 교보문고 뒤 광화문 D타워 한옥 구조물 유리바닥 아래로는 청진동 시전 터를 볼 수 있게 해뒀다.
서울시는 지난달 22일 15·16지구에 국내 최대 유적 전시관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재개발사업 조건 중 용적률을 803%에서 1052%로, 높이를 70m에서 104m로 완화하는 대신 전시관 면적 4745㎡를 기부채납 받기로 했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3818㎡)보다 넓다. 건물은 기존 17층에서 25층으로 높여 지을 수 있게 된다.
오 원장은 발굴 문화재가 새 전시관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수장 공간, 관리 인력을 전시관에 두긴 힘들 겁니다. 국보 지정 가능성도 있는데, 진품을 두면 보안 시설도 갖춰야 하거든요. 이런 한계 때문에 새 전시관엔 모조품을 둘 가능성이 커요. 진품은 문화재청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 귀속될 곳을 정할 겁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서울시가 유력한 곳들이죠.” 오 원장은 “어디로 가든 15·16지구에서 발굴한 유물은 한데 같이 가야 한다”고 말했다
■누가, 언제, 왜?
다시 발굴 때 이야기를 들었다.
“동종같이 덩어리가 큰 건 항아리 밖에 두고, 금속활자처럼 작은 건 항아리 안에 뒀어요. 이걸 그냥 땅에 묻어두면 나중에 다시 수습하기 어렵잖아요.” 쇠붙이들은 다 동(銅)이다. 15세기까지 조선은 주조 기술이 좋았다. <태종실록>을 보면, 1417년(태종 17) “대마도 수호 종정무가 동철(銅鐵) 5백 근을 보내었으니, 종(鍾)을 본보기로 만들어 주기를 청”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삼국 시기 장신구·마구, 통일신라·고려 때는 불상·범종에 쓴 금속이다. 값어치는 어느 정도일까. 조선 전기와 후기를 1대 1로 비교할 순 없는데, 대략 가치를 짐작할 기준 하나는 있다. ‘조선숙종시대의 광업 및 주전연구’(김양구, 1973) 논문엔 1801년 이후에는 구리 1근의 가격이 은 1량으로, 현대 시세보다 10배 높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육하원칙 중 풀리지 않은 의문을 두고 오 원장은 지금 공평동이 시전 중심가인 운종가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발굴 지역에 시전 상인 창고가 많았던 건 분명해 보여요.” ‘시전 상인이 임진왜란(1592~1598)이 났을 때 값어치가 나가는 구리 중 작은 것(금속활자)은 항아리 안에 두고 큰 것은 곁에 묻고 피난 갔다’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중인일까?
■뻘밭 곳곳에 내가 흘렀다
“양반이 살았을 수도 있죠.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 가면 능성 구씨 가옥도 있고요” 구수영(1456~1524)의 집이다. 세종의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의 사위다. 영응대군 형인 세조가 동생에게 구수영을 사윗감으로 정해주며 이곳에 살 곳을 마련해줬다. “하지만 지금 보시다시피 비가 오면 죽탕이 되잖아요. 양반이 이런 데 살았겠냐는 말이죠.” 이날 마른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지기도 했다. 유적 내 여러 웅덩이에 물이 고였다.
오 원장은 북쪽 펜스에 바로 붙은 승동교회를 가리켰다. 항아리가 발견된 지점과 비교하면 대략 5m 위다. “조선 전기 저기가 언덕이었어요. 저기서 시작된 능선이 ‘이건희 기증관’ 부지 후보지 중 하나인 송현동까지 이어졌죠. 양반들은 조망 좋고, 배수도 잘 되는 북촌 같은 데 주로 거주했어요. 이곳엔 중인이나 관하 아전이나 아속들이 살았고요. 출퇴근 거리도 가깝고, 관리에도 유리했겠죠.” 주변엔 하천이 많았다. 안국동천, 백운동천, 삼청동천 등이 청계천으로 이어졌다. 고산 김정호(1804~1866)의 ‘수선전도(首善全圖)’에 이 지천들이 표시됐다. <조선왕조실록>엔 청계천 일대 홍수와 인명 피해 기록이 여럿 나온다. 그 천들은 일제 강점기와 광복 뒤 복개됐다.
유물 발굴 전 ‘나 구역’의 주 발굴 대상 유구는 배수로다. 항아리 발견지 오른쪽으로 5m가량 떨어진 곳에 동-서 방향으로 난 배수로가 있다. “당시 도성의 도시 계획이나 배수 체계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 유구죠. 배수로가 건물들끼리 불법 증축을 막는 경계 역할도 한 듯하고요.”
■신도시 개발과 재개발이 이뤄졌다
“조선이 건국되고 한양에 요즘으로 치면 신도시 개발을 한 겁니다.” 조선의 시전 행랑은 1412~1414년 건설됐다. 지금의 종로 1~3가, 남대문로에 2000여 칸이 형성됐다. 공평동, 수송동, 인사동, 청진동을 아우르는 견평방(堅平坊)엔 의금부, 전의감 같은 관청, 순화궁, 죽동궁 같은 궁가가 들어섰다. 시전, 관청, 궁가가 어우러진 한양 중심지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터졌다. 시전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파괴됐다. 이후 도시 재건이 이뤄졌다. “지금 보존 상태가 좋은 건 16세기 겁니다. 전란이 끝나고 종로 일대에서 이뤄진 재개발은 큰 단위가 아니라 각각의 집들을 새로 짓는 거였어요. 기술이 없다 보니, (16세기) 터 위에 다시 짓는 거죠. 그래서 보존이 잘 된 겁니다. 18세기는 17세기 것들을 파괴하고, 19세기는 18세기 것들을 파괴해서 그때 것은 별로 남아 있지 않거나 상태가 좋지 않아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의 유구나 유물도 대부분 16세기 것들이다.
“항아리를 발굴한 곳 밑에는 15세기 집터가 또 있어요. 습지이다 보니 사람들이 다져진 터에 다시 흙을 붓고 계속 올려 지었죠. 배수로도 올라오고, 집 석축도 올라오고요. 20세기까지 이어진 거죠.” ‘나 구역’ 모서리 끝에는 조선 시대 돌덩이 위로 일제 강점기 벽돌이 드러난다. 일제 강점기 종로대로가 정비되며 다져진 지표 높이가 지금까지 유지됐다. 오 원장이 말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땅 밑에 60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다 남은 거죠. 문헌으로만 전하던 유물들도 드러났고요. 로마 같은 도시처럼 문화와 같이 숨 쉬는 거죠.”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원인미상 치킨집 화재, 알고 보니 ‘이게 원인’
- 오세훈, 윤석열 탄핵·수사지연 “옳지 않다”…한덕수에 “당당하려면 헌법재판관 임명”
- 박지원 “19일 거국내각 총리 제안받아···윤석열 임기 연장 음모”
- 회사가 끊은 물, 시민이 보냈다…남태령에서 구미 농성장 이어진 성탄절 선물
- ‘모르는 사이인데’…성탄절밤 10대 흉기 난동에 또래 여학생 사망
- 사직·사직·사직…대통령실 ‘대탈출’
- 부산 파출소 경찰관, 총상 입고 숨진 채 발견
- 윤석열과 국힘 지도부, 법복 입었던 이들이 ‘법꾸라지’가 됐다
- ‘구미 공연 취소당한’ 가수 이승환, 스태프에도 보상···“스태프는 또 다른 피해자”
- 어른들 땅 분쟁 때문에…등하굣길 컨테이너 ‘불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