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올림픽을 끌고 간 건 선수들이었다

이준희 2021. 7. 31. 11:3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020 도쿄올림픽][한겨레S] 특집
올림픽의 질문들
'버블방역' 약속은 물거품 됐지만
선수들의 피땀·눈물 여전히 감동
승리 못해도 기꺼이 승자에게 축하
정치 악용해도 선한 마음 이어져
'올림픽의 미래' 질문 쏟아진 대회
18일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환영행사가 열리고 있는 일본 도쿄 아카사카 영빈관(아카사카 별궁) 앞에서 올림픽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교도통신 AP 연합뉴스

‘2020 도쿄올림픽’이 드디어 개막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지난해 7월로 예정됐던 대회는 코로나19 확산이라는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나 사상 첫 연기가 이뤄졌다. 잠잠해질 줄 알았던 전염병은 더욱 기승을 부렸고 개막 당일까지 취소론이 흘러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23일, 6만8000석 규모를 자랑하는 도쿄 국립경기장에 1000여명의 내외빈만 참여한 가운데 무관중 개막식이 열렸다. 일본 국민들은 경기장 밖에서 올림픽 반대 시위를 벌였다. 많은 이들이 이번 대회를 “세상에 없던 기이한 올림픽”이라고 평했다.

전염병 확산 속에 열린 초유의 대회. 하지만 이 기이한 올림픽 속에서도 스포츠의 감동은 여전했다.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고, 시대를 풍미한 스타들이 유종의 미를 거두며 올림픽 무대를 떠난다.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한계를 넘어서는 선수들의 집념, 패배를 직감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투혼은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지금까지 도쿄에서 보낸 약 2주일은 기이함과 감동이라는 극단적인 느낌 속에서 끝없이 올림픽과 스포츠의 의미를 되묻는 시간이었다.

안전·안심 올림픽? 맙소사!

일본 나리타공항에 도착한 건 지난 16일. 개막보다 1주일 빠른 입국이었다.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총 4일 동안의 격리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2주 동안은 대중교통도 이용하지 못한다고 했다. 입국 전 코로나 검사를 두번 받았고, 입국 수속에는 4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코로나 검사를 한번 더 받았다. ‘음성’ 판정을 받고서야 일본 땅을 밟았다. 도쿄의 날씨는 뜨거웠다. 태양빛에 눈을 뜨기 힘들 정도였다. 곧바로 조직위가 마련한 ‘방역 택시’를 타고, 지정된 호텔로 이동했다. 일본 정부는 이번 대회가 “안전·안심 올림픽이 될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래서 이리 방역에 철저할까?’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려던 찰나. 맙소사. 택시 운전사가 마스크로 코를 가리지 않았다. 도쿄올림픽의 첫인상이었다.

조직위원회는 ‘버블 방역’을 자신했다. 지난해 미국프로농구(NBA)가 플레이오프를 치를 때 쓴 방식이다. 미국프로농구 사무국은 플로리다주 디즈니월드에 대회 관계자를 모두 몰아넣고, 외부와 단절된 채 경기를 열었다. 그 모습이 마치 물방울 속에 있는 듯하다고 해서, 버블이란 이름이 붙었다. 조직위는 도쿄에 온 해외 방문객의 이동수단, 숙박시설을 통제하고 무관중으로 대회를 치러 일본인들과의 접촉을 차단하겠다고 공언했다. 코로나 확산을 우려하는 일본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 내놓은 약속이었다.

23일 일본 도쿄 신주쿠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에서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버블 방역은 개막도 전에 거품처럼 사라졌다. 선수촌에선 18일 선수 2명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애초 단 22개 팀이 참가한 미국프로농구 모델이 205개국 1만5000명이 참가하는 대회에 통할 리 만무했다. 게다가 이들의 몇배나 되는 취재진과 기타 대회 관계자는 선수촌이 아니라 도쿄 시내 곳곳에 머문다. 통제는 불가능했고, 일탈이 시작됐다. 일부 대회 관계자가 음주가 금지된 시간에 도쿄 번화가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이 언론에 포착됐다. 영국·미국 기술 스태프들이 마약을 하다 체포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는 지난 21일 “버블 방역 실패를 인정하느냐”는 일본 언론의 계속되는 질문에 대답 대신 “(질문의) 룰을 지키라”며 버럭 화를 냈다.

도쿄올림픽 취재증을 목에 걸고 거리를 걸을 때면 눈치가 보였다. 자원봉사자들이 유니폼을 입고 지하철 타기를 두려워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일본 정부는 ‘부흥올림픽’을 내세웠지만, “누굴 위한 부흥이냐”며 시민들의 항변은 끊이지 않았다. 경제적·정치적 이권을 위한 메가 이벤트로 전락한 이번 올림픽의 민낯이 드러났다는 평이 현지에서 나온다. 나고야 시민 다카세 유리(27)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올림픽 개최에 대한 소감을 묻자 “후쿠시마에 일어난 비극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일본 국민 모두 갖고 있다. (도쿄올림픽 개최는) 이런 마음을 악용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에 더해 경기 운영도 차질을 빚었다. 각국 선수단은 더운 날씨에, 배려 없는 운영에 혀를 내둘렀다.

기대 이하 성적? 기대 이상 감동!

흔들리는 올림픽을 바로잡아 끌고 간 건 선수들이었다. 대회가 시작되자 선수들이 온몸과 마음을 다해 치러내고 있는 경기로 세계인의 관심은 점점 옮겨가기 시작했다. 특히 개최국인 일본에서는 초반 경기가 집중된 유도에서 많은 메달이 나왔다. 25일 ‘유도 남매’ 아베 우타(21)와 아베 히후미(24)가 같은 날 나란히 유도 금메달을 획득하며 일본 주요 일간지의 1면을 장식하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호텔 텔레비전에서도 코로나 뉴스 대신 올림픽 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선수들의 투혼에 열광했다. 실패에는 함께 아파했고, 성공에는 함께 기뻐했다. 올림픽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한국 선수단은 개막 다음날인 24일부터 양궁 혼성 단체전에서 금메달 소식을 전했다. 25일 여자 양궁 단체전에서 9연패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다음날 남자 양궁팀도 단체전 금메달을 추가하며 올림픽 분위기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햇볕에 얼굴이 빨갛게 익은 채로 연신 “파이팅!”을 외치는 양궁팀 막내 김제덕(17)을 보면 마음이 짠하면서도, 그 우렁찬 목소리에 힘을 받았다. 취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에서는 녹초가 되어 이어폰을 낀 채 “파이팅!”을 외치는 영상을 몇번이고 돌려봤다. 펜싱 여자 에페팀이 27일 준결승에서 중국을 극적으로 꺾고 포효할 때는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만큼은 기자들도 노트북에서 손을 뗀 채 카메라를 들고 영상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펜싱 남자 사브르팀이 준결승에서 접전 끝에 독일을 누르고 결승에 오른 뒤, 이탈리아까지 꺾으며 금메달을 획득할 때는 경기를 함께 지켜본 기자들의 얼굴도 상기됐다.

한국 대표팀이 이번 대회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사격, 태권도 등 전통적으로 강한 종목에서 금메달을 놓친 영향이 크다. 하지만 선수들은 기대 이상의 감동을 보여줬다. 이다빈(25)은 태권도 결승에서 패한 뒤 상대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는 “아쉬운 건 사실이지만 이 큰 무대를 위해 고생한 것을 알고 있기에 축하해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대훈(29) 역시 태권도 동메달 결정전에서 패한 뒤 역시 ‘엄지척’을 날렸는데, “승자의 기쁨을 극대화해주는 게 선수로서 도리이자 예의”라고 했다. 선수들이 보여준 이런 품격은 금메달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23일 오후 일본 도쿄 신주쿠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에서 대한민국 선수단이 입장하고 있다. 도쿄/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이른바 제트(Z) 세대가 주도하는 변화도 인상적이었다. 양궁 대표팀 주장 강채영(25)은 여자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한 뒤 블랙핑크의 노래 ‘붐바야’가 흘러나온 것을 두고 “실은 방탄소년단(BTS) 노래를 부탁했는데,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딸 때는 방탄소년단의 ‘다이너마이트’를 틀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올림픽 메달 획득 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가 나오기를 바라는 모습은, ‘국위선양’이 제1의 목표였던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었다. 올림픽을 즐기는 선수들의 모습에서 신선함이 느껴지면서도, 그들이 느낄 부담감을 헤아릴 수 없어 찡한 마음도 들었다.

어느새 그들과 함께 올림픽을 치르고 있다는 기분이다. 기세 좋게 2관왕을 따낸 김제덕이 27일 개인전에서 탈락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3일 동안 양궁장을 취재하다 펜싱 경기장으로 옮겨온 기자들 사이에서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몸이 하나뿐이어서 안타까운 시간이었다.

목표는 메달? 아쉽지만 괜찮아!

이번 올림픽은 한국 사회가 스포츠의 가치를 새롭게 찾을 기회이기도 하다. 현장에선 올림픽에 대한 여론의 관점이 변한 것도 느껴진다. 사람들은 더는 예전처럼 애국심 고취와 메달 획득에 목을 매지 않는다. 태권도가 사상 초유의 ‘노 금메달’로 대회를 마감했을 때도, 굳이 이 사실을 강조해야 하느냐는 반응이 많았다. <문화방송>(MBC)이 개회식과 축구 중계 때 다른 나라를 무례하게 표현해 홍역을 치른 것도 이런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여론의 변화 속에, 현장 기자들도 기사에 어떤 가치를 담아야 할지를 더욱 고민하게 됐음은 물론이다.

럭비가 도입된 지 98년 만에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에 도전한 한국 럭비 대표팀에 대한 관심도 이런 변화를 보여준다. 럭비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뉴질랜드(5-50), 호주(5-42), 아르헨티나(0-56), 일본(19-31)에 잇달아 패하며 대회를 마감했다. 비록 1승도 거두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럭비팀에 많은 격려를 보냈다. 특히 1점도 내지 못한 아르헨티나와의 경기를 보면서 “1점을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눈물이 났다” “럭비 대표팀이 희망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는 반응이 줄을 이었다.

선수들도 변했다. 더는 메달을 못 땄다고 고개 숙이지 않는다. 박태환을 이을 기대주로 평가받은 황선우(18)는 이번 대회 남자 자유형 200m 결승에서 7위를 차지하며 메달 획득에는 실패한 뒤, “아쉽지만 괜찮다”며 ‘쿨한’ 모습을 보였다. 올림픽 사상 첫 3관왕 도전에 나선 안산(20)은 “즐기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하겠다”고 했다. 한국 선수단 막내로 올림픽 수영에 도전하는 이은지(15)는 “올림픽 메달보다도, 최선을 다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봐주시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은메달과 동메달을 따고도 침울한 표정으로 시상대에 오르던 모습도 사라졌다. 여자 에페팀은 은메달을 들고 환하게 웃었고, 기자들도 진심을 담은 박수를 보냈다. 림프암을 이겨내고 동메달을 목에 건 태권도 인교돈(29)이 “제가 운동을 다시 시작할 때는 올림픽이라는 단어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다. 투병하시는 분들이 저로 인해 조금 더 힘내셔서 잘 이겨내셨으면 좋겠다”고 할 때는 ‘이게 올림픽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뭉클했다.

대회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올림픽보다도 한국에 관심이 많았다. 매일이 방탄소년단의 인기를 체감하는 날들이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저는 한국을 좋아합니다”라는 말이 자동적으로 따라왔다. 대회 스태프나 현지 자원봉사자에게 “일본에선 누가 금메달을 딸 걸로 기대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우물쭈물하기 일쑤였지만,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느냐” “한국 음식은 뭘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폭포수처럼 말이 쏟아졌다. “올림픽을 통해 한국과 일본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도 자주 했다. 그들에게 올림픽은 메달 경쟁이 아닌 교류의 장이었다.

올림픽과 스포츠의 길을 묻다

1964년 도쿄올림픽은 일본인들 스스로 진정한 의미의 ‘부흥올림픽’이었다고 자부한다. 일본은 이 대회에서 전쟁으로 무너진 일본이 다시금 일어섰음을 전세계에 공표했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2013년 이번 대회를 유치하면서 상상했던 올림픽도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드러났듯이, 현실은 상상과 달랐다. 코로나19 확산이라는 특수 상황은 사람들에게 올림픽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했다. 더는 지금까지의 올림픽 모델이 유효하지 않음이 확인되고 있다. 정치적으로 악용된 기이한 올림픽이라는 평가 속에서도 동시에 여전한 감동을 주는 선수들의 피땀과 눈물은 올림픽이 진짜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도 보여준다.

2020 도쿄올림픽은 훗날 어떤 대회로 기억될까. 무리하게 강행하다 실패한 올림픽이 될 수도, 재난 가운데서도 치러낸 감동의 스포츠 제전이 될 수도 있다. 아직 그 답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이 기이한 올림픽이 다른 어떤 대회보다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이제 올림픽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나? 대자본이 투입되고 흥청망청 즐기는 올림픽이 아니라 진정 스포츠 정신이라는 고유한 가치를 살리는 올림픽이 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 다음 세대 스포츠인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올림픽이라는 인류의 축제가 정치적 노림수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어떡해야 하나? 인수공통감염병의 확산 가운데 올림픽은 이제 인류만을 위한 축제가 아니라 지구촌 공생을 위한 축제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분명한 건, 이런 질문에 인류가 응답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도쿄/이준희 기자 givenhappy@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