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판검사는 '보자기', 형사부 검사는 '캐비닛'

CBS노컷뉴스 곽인숙 기자 2021. 7. 31.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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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정명원 대구지검 서부지청 부부장검사
국민참여재판의 '달인'..'상주 농약사이다 사건' 유죄 입증해내
핵심요약
검사들의 치열한 일상과 고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 나왔다. 16년차 검사인 대구지검 서부지청 정명원(44·사법연수원 35기) 부부장검사는 신간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너무도 친숙한 '사람' 검사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신간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의 저자인 대구지검 서부지청 정명원 부부장검사. 한겨레출판 제공.

예전에 검찰에 출입할 때 들은 이야기가 있다.
훨씬 일찍부터 검찰을 출입했던 선배기자는 "우리가 대검찰청, 중앙지검에서 만나는 검사는 상위 1퍼센트 안에 드는 엘리트 검사들이다. 대부분의 검사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지방을 떠돌아다닌다"고 말했다.

그렇다. 대권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처럼 언론의 톱뉴스를 장식하는 '거악' 척결의 대명사인 특수부 검사는 전체 검사 2천여명 중에서 겨우 백여명도 채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검사들은 고속도로 화장실의 지갑 분실 사건의 CCTV를 뒤지며 수사에 비협조적인 소년범의 부모를 설득하며 강제 추행당한 청소년 피해자가 재판에 참석하길 학수고대하며 하루하루 생의 한 귀퉁이를 내어주고 있다.

바로 이런 검사들의 치열한 일상과 고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 나왔다. 16년차 검사인 대구지검 서부지청 정명원(44·사법연수원 35기) 부부장검사는 신간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한겨레출판)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너무도 친숙한 '사람' 검사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오래된 검찰청 건물에는 창마다 방범창이 있어. 그야말로 검찰청 창살 쇠창살인 셈이야. 보통 방범창은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하는데, 검찰청의 창살은 그 반대의 용도, 그러니까 안으로부터 누군가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용도로도 설치된다는 사실은 우리의 일터를 한결 더 서늘하게 하지. 쇠창살이 총총히 쳐진 창을 등지고 세상으로부터 실려온 기록에 머리를 박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세상이 갇힌 것일까, 내가 갇힌 것일까, 아득한 생각이 밀려오기도 해._9쪽 '프롤로그 낭만주의 이끼 씨의 검찰 생존기' 중에서

프롤로그부터 심상치 않다. 4부로 구성된 이 책의 1부에서는 대한민국 검사의 90%인 평범한 '직장인' 검사들의 리얼한 이야기가, 2부에선 저자를 찾아온 피해자·민원인·피고인·증인 등 이름만 바뀌어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의 사연들이 등장한다. 3부에는 슬기로운 검사생활을 위한 검사들의 필수 아이템인 보자기·캐비닛에 관한 소개부터 일상 속 코믹한 일화들이, 4부에는 '외곽주의자'로 살아왔던 저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유쾌하고도 따뜻하게 담겨있다.

검사의 '캐비닛'과 '보자기'

캐비닛 안에 쌓인 사건들은 배당 즉시 처리하지 못한 적자 경영의 산물이지만, 또한 검사가 파먹고 살아야 할 양식이기도 하다. 캐비닛이라는 공간에다 양식을 가득 쌓아놓고 검사는 그 열쇠를 자신만 아는 장소에 소중히 보관한다. 어찌 되었든 그 캐비닛에 들어앉아 있는 사건들은 그 검사의 몫, 그 검사의 책임 아래 있는 것이다._229쪽

형사부 검사의 아침은 캐비닛을 여는 것으로 시작된다. 형사부 검사란 언제나 자기 몫의 캐비닛과 함께 흔들리는 자, 흔들리며 머물거나 나아가는 자라고 저자는 말한다.

보자기의 색깔은 빨강, 파랑, 골드, 핑크까지 다양하다. 어쩌다 보니 ○○청과의 로고가 박힌, 아마도 어느 명절 과일 선물 세트 같은 것을 날랐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자기도 있다. 언젠가 공판검사들끼리 모여 이야기해본 결과 각자 선호하는 보자기의 색깔이 달랐다. 누구는 역시 검찰은 파랑이라고 했고, 골드의 럭셔리 이미지를 추구한다는 이도 있었다. 다양한 취향 중에도 유독 선고가 있는 날은 빨강색을 고집하는 검사가 있어 그 이유를 물으니 답은 간명했다. '승리의 레드!'_225쪽

저자는 세상과 사람의 사연들을 기록으로 묶어 법정으로 옮기고, 이를 다시 법정에서 풀어내는 것이 공판검사의 일이라는 측면에서 '보자기'와 같다고 말한다. 아웅다웅 울먹이는 사연들을 빠짐없이 잘 챙겨 법정으로 옮기는 일, 그 모두를 기꺼이 안아내는 일을 하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역시 검찰 내 '공판 어벤져스'로 불리는 검사답다.

검찰 내 국민참여재판의 '달인'으로 불리워

저자는 자타 공인 국민참여재판의 '달인'으로 불리운다. 국민참여재판은 일반 국민인 배심원들이 형사재판에 참여해 유무죄 평결을 내리는 제도다. 배심원들 평결은 법적 구속력이 없지만 판사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검사들에겐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갈아넣어야 하는 재판이다. 그 어려운 형법의 적용 원리를 낱낱이 쉽게 설명해 배심원들을 설득해야 하는 점에서 수십배의 공을 들여야 한다. 이런 중대한 국민참여재판을 맡게 된 검사들은 누구라도 저자의 도움을 구한다.

검사 생활 10년차에 저자는 운명적인 '인생 사건'을 만났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상주 농약사이다' 사건이다. 80대 할머니가 이웃 할머니 2명을 사망에 이르게 하고 4명을 중태에 빠지게 한 이 사건에서 저자는 유죄를 입증해 배심원들의 전원 만장일치 유죄 의견을 이끌어냈고 대법원에서도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직접 증거 없이 간접 증거만 있는 이 사건에서 저자는 간접 증거들을 하나하나 모으고 해석해 싸우는 동시에, 피해자의 목소리를 법정에 불러와 실질적인 삶이 없어져 버린 그들의 현실을 상기시키며 유죄를 입증해냈다. 저자는 사건을 재구성해 하나의 스토리텔링을 이끌어내면서 '이야기꾼 검사'로 재탄생했다.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최종진술의 어느 순간, 사건과 일체된다는 느낌이 확 드는 몰입의 경지에 이르는 순간이 있었어요.  당시 재판을 준비하면서도 늘 두려워 악몽을 꾸고 잠도 잘자지 못햇는데 그 순간 '나는 더이상 한이 없고 어떤 결과가 나와도 할만큼 다 했다', 그런 느낌이 들었고 그 이후에도 그 순간의 기억과 경험이 큰 도움이 됐어요."

저자는 30일 CBS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10여년 전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공판검사의 소회도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소설보다 더 박진감있게 펼쳐냈다.

매일의 공판정에서 우리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소환장을 받아 들고 공판정에 들어와 그들이 쏟아놓는 각양각색의 이야기들 앞에 우리는 종종 어떤 벽에 부딪치곤 한다. 천 갈래 만 갈래의 세상사 앞에 법조인 나부랭이가 품을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상상력이란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 소주 한 병이 주량인데 그날은 기분이 좋아 혼자서 소주 다섯 병을 마셨고 그다음부터 기억이 안 난다는 준 강간 피해자의 진술을 듣고 "혼자서 다섯 병을 마셨다고요?" 놀라고 황당해하던 우배석 판사의 표정을 기억한다._30~31쪽

공판검사는 피해자의 이름으로, 혹은 공공의 이익이라는 국민의 이름으로 공판정에 나아가지만, 대부분 검사를 적대시하는 사람만 가득한 곳이 법정이다. 검사의 부당 기소를 주장하며 절절히 억울함을 토로하는 인상이 선량해 보이는 피고인과 그를 호위하는 변호인들, 피고인을 응원하며 공판검사에게 적의 가득한 눈빛을 쏘는 가족과 지인으로 방청석이 가득 찬 법정에 홀로 앉은 검사에게 법복만이 방패막이 되어준다. 법복을 입고 그 자리에 있는 한 검사는 외로운 개인이 아니고 흔들리면 안 되는 공익의 대변자가 된다. 법복은 공판검사의 특수 슈트이고, 강철 갑옷이다. _88~89쪽

"새파랗게 젊은 년이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 거냐!"

재판정에서 피고인에게서 욕을 먹은 후배검사에게 괜찮냐고 물으니 "뭐·· 늙은년보다는 낫잖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그녀는 이제부터 자신을 '딥 블루 레이디'로 불러달라며 유쾌하게 웃었다. 우리나라 여성 검사 1세대이자 최초의 여성 검사장인 조희진 전 검사장도 그런 욕설을 들었다니 참 역사가 깊은 '욕'이었다.

여성 검사, 엄마 검사로서의 소회와 경험도 담담하게 풀어내 더 와닿는다. "늙어 보이려고" 염색하지 않던 저자는 여성에게 젊어보일 것을 강요하는 사회와 오히려 젊음을 불편해하는 직업 사이의 그 아이러니 속에서 균형을 찾기란 때때로 어려운 것이어서 하릴없이 흰머리나 늘리고 있다고 소회를 털어놨다.

또한 대부분의 일상을 사건 속에 파묻혀 아이 둘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크다면서도, 자신의 어머니처럼 "인생의 많은 문제들로부터 담대하면서도 그 안에 숨은 작은 기쁨들과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게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는 저자의 말에는 힘이 있고 울림이 있다.

적성과 진로, 조직 내에서의 위치 등 어느 직장인이든 고민하는 지점에서 치열한 고민 끝에 자신 만의 '이야기꾼' 재능을 찾아 잘 자리매김한 정명원 부부장검사는 같은 고민을 가진 직장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런 내가 검사여도 괜찮을까?' 늘 고민해왔어요. 그 답은 내 안에 나를 기준으로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죠. 다른 사람들은 승진코스와 보직관리 등 외부적인 기준에 중심을 두지만 결국 내가 갖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에 답을 주지 않더라구요. 내가 행복하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인지 자기 만의 기준을 갖고 외부적인 시선 등에서 올 수 있는 그 흔들림을 받아들이고 중심을 잡는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검사들이 쓴 책과 많이 다른 이 책은 출간 2주 만에 벌써 2쇄를 찍었다. 검사게시판에도 독후감이 잇따르고 있다는 후문이다.

대구지검 김후곤 검사장은 "정 부부장검사는 일은 뒷전이고 말과 글로만 정의로운 척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려는 '얼치기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며 "'우리도 이렇게 훌륭한 검사를 보유하고 있다'는 자랑삼아 일독을 권해본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구지검 서부지청 정명원 부부장검사가 쓴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한겨레출판 제공.

CBS노컷뉴스 곽인숙 기자 cinspain@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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