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 윤봉길 의거 뒤이은 올림픽 낭보,조선을 뒤흔들다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입력 2021. 7. 31. 06:00 수정 2021. 7. 31.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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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
日 마라톤 제패한 김은배·권태하, 대한남아 기개 펼친 윤봉길

90년전 경성은 떠들썩했다. 도쿄에서 날아온 뉴스였다. 1932년 제10회 LA 올림픽에 출전할 마라톤 대표 선수를 뽑는 최종선발전에서 조선 청년 둘이 나란히 1,2위를 차지했다. 5월25일 오후2시30분 도쿄 신궁 외원(外苑)경기장에서 출발한 42.195㎞ 풀코스 경기였다. 권태하는 2시간36분50초로 들어왔고, 김은배가 2시간 37분 59초로 뒤를 이었다. 스물여섯 청년 권태하는 경기 이틀전 ‘발열되야 와석하야있다’가 거둔 값진 성과였다.

1932년 제10회 LA올림픽에 마라톤 대표로 출전한 김은배(왼쪽)와 권태하. 일장기를 달았지만, 조선인 첫 올림픽 출전이었다. 김은배는 당당히 6위에 입상했다./대한체육회 공식블로그

‘일본서 세계기록을 지었다던 영목헌웅(鈴木憲雄)군과 숙적 고교(高橋)군을 쾌히 물리쳐 조선인 선수가 일이착의 영예를 독차지한 것은 운동계뿐 아니라 우리 조선 민족으로서 다같이 경하할 일이다.’조선일보 1932년5월27일자 ‘세계올림픽 최후예선 조선 대표선수가 우승’ 기사 마지막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올림픽의 꽃’ 마라톤에 출전할 선수로 조선 청년들이 일본을 대표하게 됐으니, 말 그대로 쾌거였다.

도쿄 승보가 날아오기 직전, 조선엔 긴장감이 돌았다. 상하이에서 날아온 급보때문이었다. 4월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스물넷 청년 윤봉길이 일왕 생일 겸 전승축하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졌다. 시라카와(白川義則)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이 죽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 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등에 중상을 입혔다. 장제스 국민당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다시 보게 됐다. 침체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놓은 쾌거였다.

'혁혁한 양 용사의 수훈'. 김은배, 권태하 두 선수가 마라톤 올림픽 대표선수로 선발됐다는 조선일보 1932년5월27일자 보도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의거 직전 한인애국단에 입단하면서 수류탄과 권총을 들고 서약하는 사진. 조선일보 1932년 5월27일자 석간 2면에 실렸다. 권태하,김은배가 일본 마라톤을 제패했다는 뉴스를 보도한 같은 날자 신문이다. 1면엔 '반도 남아의 의기' 사설이 실려 미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반도 男兒의 意氣' 사설

조선일보는 ‘상해축하식장에서 조선 청년이 폭탄 투척’(5월1일자), ‘상해폭탄사건 화보’(5월4일자) ‘상해폭탄범尹은 항일동맹의 일원’(5월7일자) 등 윤봉길 의거를 시시각각 보도했다. 권태하, 김은배의 마라톤 제패를 보도한 5월27일자 석간 2면엔 윤봉길 의사가 왼손엔 수류탄, 오른손엔 권총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찍은 사진이 실렸다. 상하이 헌병대에서 첫 군사재판이 열렸다는 톱뉴스와 함께 였다.

이 날짜 조선일보날 석간 1 면의 사설 제목은 ‘반도 남아의 의기(意氣)’. 다음 페이지에 실린 윤봉길 의거와 맞물리는 미묘한 제목이었다. 사설은 권태하·김은배의 올림픽 대표 선발을 축하하면서 이렇게 썼다. ‘조선문화의 수준, 특히 조선인이 한 개의 민족으로서 체질적으로 타인종에 비하여 손파(遜巴·손색)가 없는 것을 제시하는 역연한 재료가 된 점에 의의가 있다할 것이다.’

스포츠는 당시 단순한 운동 경기가 아니었다. 구한말 부국강병과 근대 문명의 기치를 내걸고 도입된 스포츠는 나라 뺏긴 시절, 조선인이 타인종보다 뒤쳐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시험대였다. 1930년대가 되면 마라톤, 축구, 농구, 빙상 등에서 조선인은 두각을 나타냈다. 일본에서 열리는 선수권대회를 제패하거나 뛰어난 성적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세계신기록 세운 무서운 10대

양정고보생 김은배는 한해전 10월18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조선신궁마라톤대회에서 비공인 세계신기록(2시간26분12초)을 세운 무서운 신예였다.(조선일보 1931년10월20일 ‘세계기록을 돌파한 김은배군의 수훈’) 열여덟살의 ‘세계 기록 보유자’ 김은배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다. 조선체육회와 운동기자단 등 7개 단체는 이튿날 김의 ‘세계기록 돌파 표창식’을 열기로 결정했다. 그해 11월14일 수송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표창식엔 조선체육회장 윤치호, 조선일보 안재홍,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을 비롯한 관계자 수백명이 참석했다. 그해 말 잡지 ‘동광’이 실시한 ‘조선이 낳은 10대 운동가’ 조사에서 김은배는 야구·축구 선수로 최고 인기를 누리던 이영민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연습 중 일본인 경찰에게 구타당한 권태하

김은배·권태하에 이어 권투선수 황을수(라이트급)가 올림픽 티켓을 따냈다. 6월 올림픽 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우승한 것이다. 일본 국기를 달았지만 한국인 최초로 올림픽 무대를 밟은 3명이었다.

김·권 선수가 LA로 떠나기 전날인 6월22일 조선일보는 이렇게 촌평했다. ‘권태하 김은배 양군의 뒤를 이어 권투계의 맹장 황을수군이 라이트급에서 우승하야 만국 올림픽 대회로 간다니, 조선이 세계적 무대로 나가보기는 3명이 효시다. 그러나 황을수군에게 당부하노니 도중에 권태하군에게와 같이 폭력을 사용하는 경관이 있거든, 연습 겸 ‘녹크 아웃’을 안겨보시오.’(여의봉)

권태하는 도쿄 최종 선발전 직전인 5월8일 경성에서 열린 1차 예선전을 위해 경기 이틀전 을지로에서 마라톤 연습을 하다 일본인 교통 순사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행돼 구타를 당했다. 각 체육단체와 스포츠기자단이 분개해 대책 수립에 나설 정도로 물의를 빚은 사건이었다.(1932년 5월8일 ‘마라손 조선대표선수를 교통순사가 무리 구타’). 전치 2주 부상으로 출전이 어려울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권태하는 2시간35분12초의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여의봉’ 촌평은 이 사건을 넌지시 풍자한 것이다.

◇첫 올림픽 입상, 호외로 전해

8월7일 열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김은배는 2시간 37분28초로 6위를 차지했다. 권태하는 경기 중반 다리에 경련을 일으켰으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 9위로 들어왔다. 함께 나선 일본인 선수 쓰다(津田)는 5위였다. 당시 올림픽 개인전은 1~3위는 메달과 상장을 주고, 4~6위는 상장을 수여해 입상으로 간주했다. 김은배는 첫 출전한 올림픽에서 당당히 입상했다. 다음날 경성 일대엔 김은배의 올림픽 입상을 알리는 호외가 뿌려졌다. 황을수는 8월9일 열린 1회전 경기에서 독일 카르츠 선수에게 판정패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코치 겸 선수로 나선 쓰다가 조선인 둘이 짜고 작전을 무시했다고 권태하와 김은배를 비난했다. 권태하는 쓰다가 팀 전술을 내세워 컨디션이 좋은 김은배가 쓰다를 앞지르지 못하게 했다고 반박했다. 조선인에게 책임을 전가한 쓰다에 분격한 권태하는 올림픽이 끝난 후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남았다.

◇日, 금메달 7개로 종합 5위

일본은 LA올림픽서 괄목할만한 성적을 거뒀다.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 이어 평영200m를 2연패한 츠루다 요시우키를 비롯, 자유형 100m의 미야자키 야스지와 1500m의 기타무라 쿠소, 800m 계영, 배영 100m 등 수영에서만 금메달 5개를 포함, 12개의 메달을 땄다. 남자 수영에 걸린 금메달 6개중 5개를 가져가면서 그간 이 분야메달을 휩쓸어온 미국의 독주를 가로막았다. 미국은 남자 수영에서 자유형 400m만 금메달을 땄다. 육상 3단뛰기와 승마에서도 금메달을 딴 일본은 금·은메달 각각 7개, 동메달 4개로 종합 순위 5위를 기록했다.

◇밤은 깊지만...

김은배·권태하의 첫 올림픽 도전은 4년 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서막이었다. 손기정·남승룡은 1936년 잇달아 열린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각각 1등을 차지했다. 일본은 4년 전 LA올림픽처럼 조선 청년들이 일본 대표로 뽑히는 걸 지켜봐야했다. 손기정 우승, 남승룡 3위의 빛나는 금자탑은 이런 곡절을 딛고 탄생했다.

윤봉길은 1932년 12월19일 일본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총살당했다. 조선의 밑바닥은 용솟음쳤지만 밤은 아직 깊었다. 해방은 12년 넘도록 더 기다려야했다. 1932년은 그렇게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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