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이중가격.. 한 아파트 같은 평인데 아랫집 3억9000, 윗집 8억

정순우 기자 2021. 7. 31. 03: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임대차법이 부른 전세시장 왜곡

서울 강동구 ‘래미안명일역솔베뉴’ 전용면적 59㎡(20층)가 지난 17일 전세 8억원에 거래됐다. 그런데 이틀 후 같은 평형 11층 전셋집이 3억8850만원에 거래됐다. 한 단지 같은 평수 아파트 전세가가 배 넘게 차이 나는 이유는 5%룰 때문이다. 임대료 인상 폭 5% 제한에 걸린 갱신 계약이냐, 이런 제약을 받지 않는 신규 계약이냐 여부가 전셋값을 극단적으로 나눈 것이다.

사라진 전세 매물 - 30일 오후 서울 송파구의 한 아파트 단지 내 공인중개업소에 매매 광고지가 붙어 있다. 지난해 7월 말 주택임대차법 개정으로 기존 세입자가 계약 갱신을 요구할 경우 전세금을 5% 이내로 올려 재계약하는 게 의무화되면서 전세 매물이 급감했다. /장련성 기자

계약갱신청구권(2+2년)과 전·월세 상한제(5%룰)를 담은 주택임대차법 개정안 시행 1년이 지난 지금. 전국 아파트 단지에선 앞선 사례와 같은 극심한 ‘전세 이중 가격’이 나타나고 있다. 서울의 경우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서 전·월세 상한제(5%룰)을 적용받는 갱신 계약과 적용받지 않는 신규 계약의 전셋값 사이에 수억원의 괴리가 생기는 사례가 수두룩하다. 최근 두 달 사이 거래된 송파구 헬리오시티 84㎡의 전세 최저값(6억8775만원)과 최고값(12억5000만원)은 6억원 가까이 차이 난다.

전세 이중 가격의 피해는 신혼부부나 새내기 직장인 등 새롭게 전셋집을 구해야 하는 세입자들에게 집중된다. 중장년에 비해 경제력이 약한 이들은 결국 서울 아파트 시장에서 쫓겨나, 빌라 전세를 택하거나 서울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세입자 주거 안정’이란 명분으로 임대차법을 개정했지만 정반대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창무 한양대 교수는 “인위적인 가격 통제가 시장을 왜곡시켜 결국 세입자 주거 안정을 해치는 결과를 낳은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주요 아파트 단지의 전세 이중 가격 사례

◇세입자 고통만 키운 임대차법

5%룰은 계약갱신 청구권과 맞물려 ‘전세 매물 급감→전세가 급등’이라는 치명적인 부작용도 초래했다. 부동산 분석업체 아실 집계에 따르면, 30일 기준 서울 아파트 전세 매물은 2만269건으로 1년 전(3만8873건)에 비해 48% 급감했다. 새 전세를 구하기보다 계약 연장을 택하는 세입자들이 급증하면서, 전세 매물 품귀현 상이 빚어진 것이다. 그 영향으로 서울 아파트 평균 전셋값(KB국민은행 기준)은 1년 전 4억9922만원에서 6억3483만원으로 27.2% 급등했다. 인기 있는 신축 대단지 아파트 중에는 전셋값이 1년 사이 50% 이상 급등한 곳도 많다. 중간 수준(3분위)의 소득을 버는 사람이 중간 수준 가격대의 전세 주택을 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뜻하는 ‘전세 PIR’은 작년 6월 7.4년에서 올해 3월 9.9년으로 늘었다. 자가주택이 아닌, 전셋집을 구하기 위해 10년치 월급을 모두 저축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지난 28일 “계약 갱신율이 57%에서 78%로 높아졌다”며 임대차법의 효과를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계약을 갱신한 세입자들도 ‘전셋값 폭탄’이 2년 유예된 것일 뿐, 갱신계약이 만료되면 주변 시세에 맞춰 전셋값을 수억원씩 올려주거나 외곽으로 쫓겨나야 할 상황이다. 심교언 건국대 교수는 “세입자들이 원하는 주거 안정의 핵심은 한 곳에서 오랜 기간 거주하는 것인데, 임대차법 개정으로 인해 앞으로는 무조건 4년 단위로 옮겨다녀야 할 처지가 됐다”고 말했다.

임대차 계약을 둘러싼 집주인과 세입자 간 갈등도 늘어나고 있다. 대한법률구조공단에 따르면 주택임대차 관련 상담 건수는 작년 상반기 월평균 5204건이었지만, 임대차법 시행 후인 작년 8월부터 올해 6월까지 월 평균 7363건으로 41% 급증했다.

◇편법만 부추기는 임대료 규제

많은 전문가들이 임대차법 개정 전부터 이 같은 부작용을 우려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세입자의 거주 안정이 최우선’이라며 임대차법 의결 및 시행 절차를 단 사흘 만에 일사천리로 마무리했다. 그 이후 1년이 지나도록 전세 시장 불안이 지속되자 결국 여권(與圈) 일각에서는 추가적인 신규 계약 임대료 규제나 표준 임대료 등 추가적인 규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갱신 계약에 5%룰을 적용한 것만으로도 전세 시장이 심각하게 왜곡됐는데, 신규 계약 임대료까지 통제하면 전세 공급이 더욱 위축되면서 되돌릴 수 없는 부작용을 낳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집주인이 관리비 명목으로 거액의 웃돈을 요구하거나, 실제 계약은 비싸게 하고 신고 금액은 낮게 하는 이면계약이 성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5%룰 때문에 전셋값을 주변 시세에 맞춰 올릴 수 없게 된 일부 집주인들이 세입자에게 청소비 등의 명목으로 매달 일정 금액을 요구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임대료 규제가 심한 유럽 국가에서는 임대주택을 구하기 위해 수백 명의 세입자가 경쟁하거나, 이면계약을 하는 사례가 흔하다”며 “우리나라도 임대차 규제가 더 심해지면 비슷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