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제1 갑부 록펠러가, 중 공산화 후에도 통 큰 기부
질병·기아 퇴치 위해 의학 지원
신중국 출범 뒤 협화의원서 손떼
17세기 중국 온 예수회 선교사들
사서삼경 외우고, 선비 옷 입어
중국인들 "서양의 유학자" 존경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7〉
록펠러는 교육을 중요시했다. 시카고대학 건립에 거액을 지원했다. 공짜 좋아하기는 당시의 미국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보다 못한 목사 한 분이 록펠러에게 경고나 다름없는 충고를 했다. “재물은 굴러다니는 돌과 같다. 쌓이는 것보다 흩어지는 속도가 빠르다. 자손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나쁜 습관에 함몰되기 쉽다. 살아있는 동안, 인류의 이익을 위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자선단체를 만들어라.” 록펠러 부자(父子)는 목사의 의견에 공감했다. 록펠러재단을 출범시켰다.
록펠러재단, 미 첫 의료연구소 설립
록펠러재단은 중국을 선택했다. 이유가 있었다. 20세기 초반 중국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국이었지만 빈곤하고, 독립된 문명 고국(古國)이었다. 자의건 타의건, 개방과 개혁이 진행 중이다 보니 새로운 것에 대한 저항이 미약했다. 동방문화를 대표하는, 고루하지 않은 우수한 지식인들도 도처에 널려 있었다. 중국 외에도 빈곤한 큰 나라는 있었지만, 나머지 특징은 중국이 유일했다.
협화의학원(協和醫學院) 전신인 베이징의학원 교수 존스톤이 록펠러재단에 보낸 장문의 서신이 록펠러 부자의 결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중국을 꿰뚫어 본 내용이기에 간추려 소개한다. “미국이 중국을 도울 시기가 도래했다.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중국인이 깨달았다. 중국 청년들은 서양의학 배우기를 갈망한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이 위대한 국가에 의학의 기초를 닦아주는 일이다. 중국 의사들의 품성을 정립시킬 원대한 계획이 필요하다. 중국의 변화는 신속하다. 만주족 황제의 통치가 하루아침에 쑨원(孫文·손문)의 공화국으로 변했다.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쑨원을 밀어낸 것도 순식간이었다. 국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공포하더니 갑자기 마음이 변했다. 지금 우리는 위안이 면류관 썼다는 소식만 기다리는 중이다.”
기막힌 훈수도 빠뜨리지 않았다. “중국에서 이익 볼 생각은 버려라. 중국의 전통과 문화에 경의를 표하고 록펠러재단이 설립한 의학원과 병원이 빠른 시간 내에 중국인의 손으로 운영되기를 희망한다고 해야 중국인들에게 영원히 존경받을 수 있다.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을 본받아라.” 맞는 말이었다. 1601년, 베이징에 첫발을 디딘 마테오 리치를 필두로 예수회 선교사들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이 머리에 꽉 차 있었다. 중국인들은 선비 복장한 예수회 신부들을 서양에서 온 유학자라며 존경했다.
록펠러재단의 운영자 록펠러 주니어는 존스톤의 충고를 명심했다. 중국 지원이 이익을 위한 투자가 아닌 자선사업임을, 196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견지했다. 중국의 의학과 농업,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연구, 평민교육과 향촌(鄕村) 건설에 거금을 투입하고 미국의 중국학 연구에도 불멸의 업적을 남겼지만 중국에서 이익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록펠러 주니어, 중국학 발전에 기여
장진호 전투 종결 직후, 협화의원 원장 리쭝언(李宗恩·이종은)이 뉴욕의 록펠러재단에 짤막한 편지를 보냈다. “협화의원이 정부에 귀속됐다.” 록펠러재단은 신중국의 결정을 존중했다. 30년 이상 해오던 지원을 멈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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