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부엌이 있는 삶
요리하고 먹는 기쁨 못누려
원룸·고시원서 사는 박탈감
벗어날 길 요원하면 희망 있나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삶(life)’을 가리키는 말은 두 가지였다고 한다. ‘조에’가 살아 있음 그 자체를 의미한다면, ‘비오스’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특유한 삶의 형태나 방식을 말한다. 전자가 생존을 위한 삶이라면, 후자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구분은 ‘이미’ 정치적이다. 조에로서의 삶에 그치는 자와 비오스로서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자, 여기에는 이미 포함과 배제의 통치술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모사케르-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의 저자 조르조 아감벤이 생명이야말로 언제나 정치의 효과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다. 나는 감히 여기에 ‘부엌’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덧붙여보고자 한다. ‘부엌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지금으로부터 30년도 더 전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우리 삶을 평정하기 전 대학가 주변에선 언제나 방을 구하거나 룸메이트를 찾는다는 벽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늘 우리의 웃음을 유발했던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잠만 자는 학생 구합니다.” ‘잠만 자는’과 ‘학생’이 얼마나 어울리는 조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저 조건의 방조차 구하기 쉽지 않았던 나의 동료, 선후배들이 많았다는 것만은 지금도 기억한다. 그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임대인-아니 여기서는 주인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집주인이 일어나기 전 집을 나와 그들이 잠을 청할 시간에서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삶, 그것이 그들의 것이었다. 잠만 자기 위해, ‘투명인간’처럼. 오로지 다음날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도의 욕구만이 허락된 삶이라고 할까.
부엌을 추방한 삶, 다만 잠만 자도록 허락된 생명. 이는 비단 30년 전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아 안타깝다. 이전과 비교해 모든 것이 ‘선진화’된 오늘날에도 ‘잠만 자는 학생’은 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늘어난 듯한가. 허다한 반지하 원룸에서, 옥탑방에서, 고시원에서 그들은 오늘도 여전히 ‘잠만’ 잔다. ‘잠만’ 자야 한다. 그들에겐 부엌이 제공하는 어떤 감각, 예컨대 밥솥의 김이 서리고 냄비가 끓어 넘치며 식탁에 수저를 놓는 소리가 들리는 어떤 공간, 어떤 활동, 어떤 시간 등이 허락되지 않는다. 이런 식의 배제와 박탈은 이미 너무 ‘정치적이다’. 그것은 항상 누군가를 그렇게 만들어놓음으로써 다른 누군가 그것과 무관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 삶이 ‘아직도’ 우리들의 미래라면,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점점 더 요원해지기만 한다면, 이 삶에 대해서, 이 삶을 강요하는 어떤 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하는 것 아닐까. ‘햇반’을 먹으며 문득 목이 메는 것이다.
신수정 명지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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